내 묘비명은 ‘아픈 기억보다 따뜻한 추억과 그리움이 많은 여자로 살다’ ①
내 묘비명은 ‘아픈 기억보다 따뜻한 추억과 그리움이 많은 여자로 살다’ ①
  • 김경희 작가
  • 승인 2021.12.03 19: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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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이후분 어르신

운명이라는 말로도 위로가 안 되는 삶이 있다.

어르신은 스물한 살에 남편을 황망하게 떠나보내고 눈망울 맑은 두 살 아들과 험난한 세상에 내 던져졌다.

열여덟 살에 시집가서 2년을 살고 어르신 인생은 앞길을 짐작할 수도 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지독하고 기막힌 세월을 거슬러 한 많은 삶은 아흔두 해를 지나고 있다.

그 세월을 어찌 살아내셨을까요. 존경합니다. 당신의 삶을...

■ 지독한 불운의 올가미

네 살 때 어머니의 죽음을 만났다. 어머니가 동생을 낳고 산후풍으로(후에 철들어 알게 된 어머니의 죽음)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돈 벌러 청산으로 가셨다가 월명광산에서 사고로 다리가 잘렸단다. 시름시름 앓다가 아버지도 결국 이듬해 돌아가셨다.

여섯 살의 나에게 남은 건 네 살짜리 동생, 여섯 살인 내가 두 해 간격으로 감당하기엔 너무 큰 시련이었다.

그치지 않는 눈물 자국으로 눈 밑이 헐어버리고 말았다.

그때부터 기구한 운명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작은 아버지 댁에서 더부살이를 시작했다. 작은 아버지도 나무 장사하시며 근근이 살던 살림이라, 작은 어머니께서 하루는 나를 불러 마른침을 삼키시며 한마디 건네셨다.

“후분아! 세산리 사는 6촌 언니네 아기 봐주러 며칠 다녀올래?”

작은어머니는 버선 두 짝, 무명 치마, 솜저고리를 곱게 접어서 보따리를 챙겨주셨다.

나를 직접 세산리에 데려다주시던 작은 어머니의 축축한 손을 기억한다. 내 손을 꽉 잡아 주시던 손이다.

작은어머니의 뒷모습이 희미해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열네 살의 나에게 유일한 언덕이던 작은어머니가 나를 6촌 언니 집에 두고 돌아가셨다.

작은어머니의 눈물을 보았기 때문에 나는 다시 작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서 야학 다니며 한글 공부를 했고 어른들이 하는 말은 귀동냥으로 열심히 들었다.

배우고 싶었지만, 나에게는 여건이 허락하지 않았다. 배움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나는 동년배 친구들보다 문리가 먼저 트여 작은어머니와 함께 6촌 언니 집으로 갔던 그날의 정황을 읽고 말았다.

살림이 어렵던 작은 어머니는 나를 6촌 언니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6촌 형부가 우체국에 다니고 있어서 때거리 걱정은 안하던 집이었다.

인심 좋던 작은 어머니는 어린 나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끝까지 나를 배려해주셨다. 세산리까지 내 손을 꽉 잡고 데려다주셨다.

6촌 언니 집에서 아이를 봐주고 살림을 살아주던 나는 열아홉 살에 세산리 남자와 결혼을 했다.

남편은 22살 농사꾼이었지만 머리가 너무 좋고 똑똑한 남자였다.

6남매 맏이였던 남편은 호롱불 아래서 나에게 줄곧 “우리 큰물에 나가서 살아보면 어때”라며 시골살이가 답답하다고 말했다.

좁은 땅에서 살기엔 남편은 기개가 넘쳤다. 농사일도 열심이던 남편은 어느 날부터인가 밤마실이 잦아졌다.

조실부모한 나는 믿고 의지할 사람이 남편밖에 없었다. 인자한 시어머니 덕분에 부모 없이 자란 설움을 위로받으면서 나에게도 평범한 행복이 주어지려나, 작은 설렘도 있었다.

운명은 나에게 그 평범한 행복도 안겨주지 않았다. 밤마실 나갔던 남편은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돌아오지 않았다.

미친 듯이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남편의 거취를 아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없었다. 물에 떠내려 오는 시체라도 건져보려고 강가에 매일 나가보았지만, 남편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남편의 이야기는 흉흉한 소문에 묻혀 나에게 들리는 말은 한 마디 한 마디 모두 비수가 되어 꽂혔다.

(짐작하건대) 보도연맹 사건에 휘말려 남편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결국 죽음으로 돌아왔다.

억울함은 호소할 수도 없었고 진위를 밝힐 수도 없이 그냥 그렇게 세상에 던져졌다.

그리고 나는 잊었다. 남편과 남편의 죽음을 잊은 것이 아니다. 남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하루하루 넋 나간 채 보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어서 속앓이를 지독하게 하며 외피만 두꺼워졌다.

■ 마지막 살길, 무작정 상경

눈물로 세월을 보낼 수 없어 큰 결단을 내렸다. 걷고 또 걸어서 옥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렸다.

남대문 시장 국밥집에서 밥 한 그릇을 뜨고 아이를 들쳐 업고 일자리를 찾아 헤맸다.

시장을 다 뒤지며 찾아낸 일자리는 파출부였다. 주인집의 아이를 봐주고 살림을 살아주는 일, 집에서 기거하는 파출부인데 우리 아이를 데리고 입주해야 하는 조건 때문에 마땅한 집이 나타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인물이 곱던 내가 아이를 들쳐 업고 가면 “이런 일 하겠냐” 며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수십 군데를 돌아 겨우 파출부 자리를 하나 얻고 부엌에 딸린 방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5년을 일했다.

일은 힘들었지만, 인품 좋은 주인 덕분에 험한 꼴 안보고 돈 모으는 재미로 버텨냈다. 다른 곳에 돈 쓸 일이 없어서 월급을 꼬박꼬박 모았다. 의원집이라 월급도 많았다

당시 80키로 쌀 한 가마니 가격이 5천 원 정도로 기억하는데 내 월급도 만 원 가량 되었다.

주인 여사장님 옷을 얻어 입고 삼시 세끼 그 집에서 해결했다. 의원집이라 달달이 내 키만큼 쌓이는 선물의 절반은 나한테 안겨주셨다. 한 푼 안 쓰고 다 모았다. 인심 좋은 가족이라 나도 더 열심히 집안일을 야무지게 했다.

인지상정으로 마음이 통해서 대접받으면서 일했지만 국민학교에 들어가야 할 아이와 같이 그 집살이를 계속할 수 없어서 대전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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