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희(1938년 ~ ) 어르신 모습
정남희(1938년 ~ ) 어르신 모습

복숭아가 제철일 때 만나 뵈었다. 어르신이 복숭아를 깎아주시며 시집가기 바로 전까지 복숭아 간소메 공장에 다녔던 기억을 떠올리셨다. 복숭아 백도 통조림, 간소메라는 일본말이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기억이 추억이 되었다. 젊은 날에는 고생만 하고 살았던 기억밖에 없어서 돌이키고 싶지 않았다는 어르신. 살아보니 다들 저마다 고단한 짐을 다 짊어지더라. 남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뿐이다. 옆 사람 보면서 못난 나를 담금질 할 것이 아니라

나는 그저 내 갈 길을 가는 것, 그게 잘 사는 것이라고 명쾌한 해답을 내놓으셨다.

배움의 통로는 다양하다. 학교에서 교과서를 통해 배우는 지식보다 삶의 현장에서

깨닫는 진리가 더 깊이 있고 울림 있다. 어르신이 바로 그 깨달음을 갖고 계셨다.

인문학 강의 한 편 듣고 나온 날이었다.

■ 작은 시골 마을, 더 작은 ‘계집애’

어린 시절 군서면 살 때 먹고 살길이 뾰족한 게 없으니 남정네들은 지게 짊어지고 식장산으로 나무하러 가고 여자들은 대전 신흥동 간소메 만드는 공장으로 새벽같이 출발했다. 공장에서 차를 대절해 주고 우리는 마을 어귀에서 새벽 6시에 만나서 그 차를 타고 출근해서 꼬박 12시간을 일하고 밤이면 9시에 집에 도착했다.

간간이 폐기처분 될 처지에 놓인 통조림을 갖고 집에 와서 동생들에게 주면 국물을 질질 흘려가면서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복숭아 통조림은 여든 살이 넘어도 맛있다. 그때 먹을 것 제대로 없던 시절에는 양반 중의 양반이었다.

간소메는 부잣집에서나 간식으로 먹고 우리 같은 서민들은 몸살이 날 때 하나씩 보양식처럼 먹던 때였다. 고 달콤하고 말랑말랑한 복숭아를 숟가락 위에 올려놓고 입으로 훅 삼키면 아 그 맛은 내가 당시에 알고 있던 가장 맛있는 맛이었다.

6.25 직후에는 천막 교실에서 내 이름 석자를 배울 때는 신기해서 연필에 침 묻혀가며 열심히 썼다. 종이는 구멍이 숭숭 나서 손에 힘만 조금 들어가면 바로 찢어져서 볼만했다.

더하기 빼기를 배우고 내 이름 정난희, 어머니 이름 이춘분을 쓸 수 있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8남매에 오빠들이 넷이라 나는 중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국민학교도 겨우 졸업했다.

오빠들은 중학교 진학하고 언니와 나는 국민학교에서 배움의 끈을 놓고 말았다.

억울할 것도 없는 것이 우리들은 다들 ‘계집애’로 살았기 때문에 가방 들고 교복 입고 공부한다는 건 사치였다. 개중에 부모 잘 만나서 중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너무 부러웠다. 내 복이 그만 인 것을 어떠겠나. 여중에 다니는 친구가 학교 가는 꽁무니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작은 시골 아이였다.

결혼 사진
결혼 사진

■ 결혼의 다른 말이 ‘고생문’이던 시절

열아홉 살에 서대리 사는 24살 총각, 최진수한테 중매가 들어와서 시집을 갔다. 포도 농사를 제법 크게 한다더니 가서 보니 초가집 처마 끝이, 키가 150센티밖에 안 되는 내 머리에 닿았다. 어차피 중신 애비 말은 반의반만 들으면 되는데 알면서 속아주는 것이다. 남편은 천하에 없는 호인이었지만 술을 이기지 못했다. 술이 그를 먹는지 그가 술을 먹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주당이었다. 결국 서른 살 무렵부터 내가 살림을 맡고 농사도 내 몫이 되었다.

열심히 산다고 인생의 숙제가 풀리는 건 아니다. 그래서 다들 고뇌하고 갈등하면서 사나보다. 나도 숨만 겨우 쉬면서 살림하고 농사를 지었지만, 남편은 매일 술타령이고 아이들은 하룻밤 자고 나면 한 뼘씩 자라느라 걷어 먹이는 것만도 숨이 턱까지 찼다. 시어머니는 치매가 와서 대소변을 계속 받아내야 했다. 곱디 고왔던 어머님이 동공이 풀린 채 기저귀를 갈아주는 나에게 맥없이 기댈 때는 짜증 한번을 낼 수 없었다. 훗날 내 모습일 수도 있고 사람은 참으로 나약한 존재라는 생각에 머물면 하염없이 눈물만 났다.

지금 생각하면 그 세월을 어찌 살았을까 싶지만, 그때는 그렇게 사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내가 아는 세상은 그게 전부였다. 여자들의 고생이 당연하고 남자들은 술을 먹고 푸는 방법이 그들의 전유물이었다. 여자들에게 참을 인을 강조하던 세상이라 우리도 그대로 길들여졌다. 나는 학교 공부는 짧았지만, 세상에 대한 호기심도 많아서 오빠들이 공부하느라 펼쳐놓은 책들을 밤이면 호롱불 아래서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시절이 있었다.

■ 여자라는 올가미를 헌신으로 되갚던 날들

큰딸 미란이가 여중을 졸업하고 상급학고 진학을 포기했다. 똑똑한 아이였는데. 대전 충남 방적 공장에 취직하고 아들들은 고등학교를 보냈다. 큰딸이 무슨 죄가 있어서 남동생들 학교 보내느라 희생을 자처했다. 큰딸이 공장으로 출근하기 전날 우리 미란이와 나는 둘이 부둥켜안고 밤새 울었다. 여고에 진학해서 공부하고 싶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는 우리 딸, 그런 딸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못난 애미. 둘 다 설움이 복받쳐 눈물이 마를 때까지 끌어안고 그 밤을 지새웠다. 내가 그 심정의 끝자리까지 다안다. 큰딸은 한달에 한번 집에 오는 날이면 쥐꼬리만한 월급을 아껴 손에 바리바리 선물을 싸들고 왔다. 내복이며 양말을 사들고 와서 동생들한테 안겨주었다. 어린 것이 일찌감치 가장이 돼서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우리는 그 시절에 ‘공순이’라는 말로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어린 여자아이들을 불렀지만, 그 아이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 호강하면서 살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나도 오빠들 공부시킨다고 중학교를 다니지 못했는데 우리 큰딸한테도 같은 전철을 밟게 했다. 가난을 벗어나는 것이 왜 그리 힘들었는지 하루 세끼 먹은 날을 기억해내기 힘들다. 명절에는 큰마음 먹고 고기 넣고 만두 빚으면서 시름을 달랬다. 아이들이 둘러앉아 두부와 김치를 면보에 넣고 물기를 짝 뺐다. 고기를 다져 만두소를 얇게 만들어 만두속을 채웠다. 다시 면보를 깔고 훈기가 오르면서 만두가 쪄질 때는 아 그 구수한 냄새는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황홀경이었다. 우리 큰딸은 만두도 어찌나 예쁘게 빚는지 살림밑천이었다. 추석과 설날에 만두를 빚고 실컷 먹었다. 1년에 두 번 뱃속이 호강하는 날이었다. 물론 6남매 중 한 녀석은 반드시 배탈이 나서 한밤중에 매실이 어디있나 찬장을 뒤지는 건 연례행사였다.

큰아들이 면서기가 되고 아이들이 밥벌이를 하면서 나도 허리를 펼 수 있었다. 남편은 술고래로 소문이 났는데 결국 간경화로 환갑을 겨우 넘기고 저세상으로 떠났다. 술이 웬수지 사람이 유죄냐 라고 하지만 나는 술이라면 소름끼치고 지겹다.

남편이 술고래로 농사일을 거들 생각을 안하니 아이들 육성회비 낼 때는 오라버니한테 손을 벌리기도 했는데 형제라도 참으로 못할 짓이었다. 매일이 고단해서 다음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던 날들도 부지기수였다. 그저 삶의 이유가 우리 아이들이었던 때라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우리 세대는 어차피 인생을 책임감으로 살던 때라 고단하고 힘들어도 살아내야 했다.

시집가서 아이 낳고 농사지으며 시어머니 수발하느라 정작 내 어머니는 돌볼 겨를이 없었다. 명절에도 찾아보지 못하니 1년에 한번 보면 양반이었다.

어머니 돌아가시던 날을 생각하면 숨을 쉴 수가 없다. 자식위해 껍질까지 다 주고 가신 어머니. 쪼그라들대로 쪼그라들어 한 줌 밖에 안남은 어머니의 몸은 처절하리만큼 안쓰러웠다.

당신을 위해 단 하루도 쓰지 않은 어머니. 나도 결국 그 삶을 살았고 우리 딸은 그렇게 살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손주와 함께
손주와 함께

■ 지독한 폭염의 끄트머리, 가을이 오고 있구나

세상이 좋아져서 우리 큰딸은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방직공장 다니면서 성실한 순경을 만나 결혼하고 이제 사위가 경찰에서 큰소리치는 정도의 직위가 되었다.

우리가 살아온 여자의 일생은 헌신이 미덕이었다.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맹목적인 헌신에서 벗어나는 세상이 온 것만도 좋은 시절이라고 생각한다.

다음 생에 한 번 더 태어날 수 있다면 나는 공부를 원 없이 해보는 것이다. 내 서재를 두고 책을 빼곡히 꽂아놓고 매일 매일 책을 읽을 것이다.

시골 할매의 허무맹랑한 소원이라고 비웃어도 꿈에서라도 살고 싶은 ‘단 하루’가 있다. 나다운, 나를 위한 삶.

모두 내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알고 산다면 우리는 행복에 상당이 가까워질 것이다.

옆 사람과 나를 비교하고 폄하하면서 불행은 시작된다.

80년을 살아보니 사람은 누구나 행·불행의 무게를 엇비슷하게 짊어지고 나온다.

어떤 이는 속을 근사하게 포장할 수 있어서 늘 좋아 보이고 어떤 이는 날것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는 처지라 불행하게 보이는 것뿐이다. 내가 내 밥을 지어 먹고 걸을 수 있으면

불행이라는 말을 떠올리지 말아야 한다. 행복은 내가 만들고 내가 떠나보내는 것이다.

나이 드니 살면서 공짜로 얻는 깨달음이 많다. 물론 처절한 인생의 대가를 치룬 후에 얻은

진리지만.

오늘 24시간을 다시 선물 받았다. 오늘은 손녀딸이 보내준 ‘근육이 연금보다 강하다’라는 책을 읽어야겠다. 표지에 아령 든 노인네 그림이 있는데 나는 아령은 못 들고

우리 동네 한 바퀴 빠른 걸음으로 걸어봐야지. 새벽녘에 이불을 끌어와서 배를 덮어야 한다. 뒤꼍 어딘가에서 귀뚜라미 소리도 나지막이 들린다. 가을이 오고 있구나!

세 딸
50년 전 사진, 세 딸 (미란이 미숙이 미정이)

[딸 편지]

엄마 미란이에요. 마음은 매일 엄마를 보고 싶고 엄마를 그리워하지만 이렇게 편지를 써본 기억은 가물가물해요. 엄마가 저한테 “내 팔자 닮으면 안 된다”고 늘 말씀하셨는데

엄마 팔자가 어때요? 시골 할머니 중에 엄마처럼 똑똑한 할머니를 본적이 없어요.

엄마는 우리한테 표준전과 같은 분이었어요. 어릴 때 엄마한테 뭐든 물어보면 해답을 주시고 언제나 지혜로우셨죠. 제가 고등학교 포기하고 공장에 취직한다고 했을 때 엄마랑 둘이 밤새 부둥켜안고 울었던 그때가 벌써 45년 전이에요. 엄마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힘든 내색 한번 안하시고 우리 6남매를 키워주신 엄마. 우리 6남매

미란 영철 미숙 영민 영수 미정, 우리한테 엄마는 여전히 영웅이세요

엄마 딸이라서 자랑스러워요.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또 사랑합니다.

미란 영철 미숙 영민 영수 미정 올림.

저작권자 © 고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