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증
학생증

이정욱 어르신 (1924년~)

8.15 광복의 기쁨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다시 맞닥뜨린 비극, 6.25

명동 한복판에서 방송이 계속 흘러나왔다. “휴가 장병은 조속히 귀대하라”

1950년 6월 25일, 평화롭던 일요일이었다. 사촌 동생과 같이 명동으로 책을 사러 나간 길에 느닷없는 방송을 듣고 온몸이 경직됐다. 일제 강점기하에서 겪었던 그 살벌한 형국과 다시 맞닥뜨릴지도 모른다는 경계심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중앙대학교 2학년 다니다가 6.25사변이 터졌다. 전쟁이 터지고 고향으로 내려오던 그 날 6월 27일 한강 다리가 폭파되었다. 상도동 집에 이불 보따리며 책들을 후스마(벽장)에 몰아넣고 못질만 한 채 서울과 잠시 이별을 했다. 가방에 책 한 권 넣고 동생들을 데리고 내려왔다.

노량진역을 지나 상도동 고갯길을 걸어 오르는데 폭파 소리를 듣고 너무 놀라서 배수로 옆에서 납작 엎드려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일제 강점기 때 폭탄 폭풍우가 쏟아지면 받았던 훈련의 암울한 기억이 전쟁 중에 본능처럼 내 몸을 다루고 있었다. 이미 전쟁의 참사를 맛본 나는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전쟁은 그렇다. 신랄한 경험이 없으면 상상 속의 일이다.

우리는 관악산을 넘어 오후 5시경에 군포에서 마지막 기차를 탔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기차는 지붕까지 사람들이 차고 넘쳤다. 6.25동란의 피난 열차에 몸을 실은 사람들의 살려는 몸부림은 세월이 지나 전쟁의 기록으로도 우리에게 선명한 사진으로 남았다. 가슴을 후벼 파는 비극의 현장이었다. 우리는 겨우 기차에 몸을 싣고 대전역에 내렸다. 밤새 주먹만 한 빗줄기가 내렸던 대전역은 이미 흥건히 젖어 있었다. 마치 우리 앞날을 예고하듯이 공포와 슬픔을 가득 머금은 대전역은 처연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안심과 우려가 동시에 맞물렸다. 지치고 힘들 때면 먼저 떠올려지는 고향, 김제평야 대농의 아들이었던 유년의 기억으로 잠시 돌아가 본다.

방귀깨나 뀌던 부안군 백산면 전주이씨네

주말이면 아이들과 같이 찾는 영동의 전원주택, 막내 이름의 문패를 달았지만, 주말이면 온가족이 모여 휴식하기에는 그만한 곳이 없다. 배산임수의 조건을 기막히게 갖춘 백 점짜리 집이다. 뒤꼍에는 텃밭까지, 구색이란 구색은 다 갖추었다. 철마다 수확하는 결실들도 달라서 노년의 나는 소소한 재미까지 덤으로 얻는다. 나는 그 집에서 혼자 3~4년 생활을 했다. 혹자들은 할아버지 혼자서 때마다 식사는 어찌했느냐며 우려의 말을 전하기도 했지만 난 잘 먹고 잘살았다. 우리 며느리들이 알아서 먹거리를 냉장고에 칸칸이 넣어두고 나는 식탁에 차리고 데워먹으면 되었다. 텃밭에 고추 감자 고구마 팥 콩 파도 다 심어서 땀 흘리는 재미를 맛보며 살아있는 나를 몸으로 기억해냈다. 내가 농사꾼 아들이었기에 유년 시절부터 몸에 밴 대농의 아들 유전자는 뿌리 깊었다. 내가 직접 농사를 거들지 않고 사랑채에 머슴들이 있었지만, 김제 평야부의 만 평 농지를 갖고 있던 농사꾼 집안의 아들이었다.

어머니, 먼 하늘을 올려다본다. 눈물이 떨어질세라

어머니, 그립다.

‘어머니’와 같은 말을 찾으려면 수도 없다. 사랑, 인동초,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지만

나는 그리움이라고 말하겠다. 어머니는 그리움이다. 어머니 생각을 하면 먼 하늘을 올려다보아야 한다. 눈동자에 가득 고인 어머니의 얼굴이 눈물방울로 떨어질세라 한참을 올려다본다.

우리 어머니 고향은 순창이었다. 순창에서 외할아버지가 한약방을 하셔서 어머니는 귀하게 자라셨다. 외삼촌도 동경에서 학교를 다니고 전주에서 약업 주식회사(제약회사)를 경영했다.

외갓집은 순창 산중이라 생선 구경도 하기 힘든 곳이었다. 어머니는 철마다 생선을 손질해서 친정에 보내셨다. 생선 젖을 봄, 가을로 보내셨다. 농사를 많이 지니까 머슴 4-6명이 집 사랑채에서 상주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생선 젖을 담아서 머슴 지게에 들려서 친정에 보내셨다. 돌아올 때는 외갓집에서 답례로 지게 한가득 다시 짊어지고 돌아왔다. 어머니는 친정에서 보내 온 보따리 하나씩 풀어 보시며 눈물을 훔치셨다. 친정 부모님 생각이 나셨을 거다. 손마디도 야무지고 고왔던 어머니. 어머니는 그리움이다.

나의 유년을 사랑으로 꽉 채워주신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은 하늘이 무너지는 거 같았다.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지금 생각하면 복막염으로 돌아가신 것 같은데 한의사 데려다 침이나 놓고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나는 고창고보에 다니느라 방학 때 집에 와보면 어머니는 복수가 차서 호흡도 겨우겨우 하셨다. 평야부의 대농이었지만 시골 살이의 한계였다 전주에나 나가야 병원이 있다 보니 대농의 마나님도 손 한번 제대로 못쓰고 돌아가시기 일쑤였다. 어머니를 너무 젊은 나이에 보내드려서 내내 애통한 마음을 추스르기가 힘들었다. 어머니를 선산에 모셔놓고 온 날은 돌아오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면서 어머니를 배웅했다.

중학교는 고창고보에 갔다. 고등보통학교는 5년제였는데 2학년 되니까 4년제로 학제가 변경되었다. 왜정 때 군대 빨리 보내려고 학제 변경을 했다. 고창읍에서 하숙을 했다.

그 옛날에는 하숙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집을 길쭉하게 지어놓고 방을 쪼개서 하숙생을 받았다. 한 달 한 번씩 머슴이 집에서 쌀가마니를 짊어지고 와서 하숙집 마당에 내려놓았다. 닷 말이면 한 달 하숙비가 된다. 머슴이 쌀가마니를 싣고 마당에 들어서면 시골 부잣집 아들의 위상도 보이고 자존감도 높아졌다. 쌀가마니 곁 소담스러운 보자기에는 어머니께서 가지런히 준비해주신 반찬들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어머니 생각에 울컥했지만 큰 숨 들이마시면서 꾹 참았다. 내가 사는 내내 거친 풍파와 싸우면서도 감정의 소용돌이로 고통 받지 않고 잘 헤쳐 나온 건 아마도 넉넉한 집안에서 사랑받으면서 잘 자란 덕분이다.

졸업 앨범
졸업 앨범, 모두 일본식 이름으로 적혀 있다.

군대 소집영장, 일제 치하 죽음의 그림자

금융조합 근무 중에 소집영장이 나왔다. 영장이 나오면 1주일 내에 군대에 가야 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일제하에 소집영장은 죽음을 바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총알받이가 되는 건 아닌가 라는 생각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부안군에서 10여명이 소집영장을 받았다. 부안에서 10여명이 모여서 신사 참배 후 군용차에 실려 신태인역에서 기차를 타고 대전으로 왔다. 아직 얼굴에 솜털이 가시지 않는 스무 살짜리 청년들의 얼굴은 경직되어 마른침만 삼키면서 터덜거리는 버스로 신태인역에 당도했다. 신태인역 출발, 대전역 도착 기차였다. 대전역에서 갈아타느라 한두 시간 여유가 있었다. 군대에 끌려가면 죽음이라는 방정식이 우리들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망을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기회를 엿보고 있던 차에 어디선가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더니 우당탕 난리가 났다. 10여명 중 한 녀석이 나보다 먼저 탈출을 시도했다. 녀석은 바로 잡혀서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일본 놈들은 군화발로 녀석의 얼굴을 사정없이 짓이기고 있었다.

군 생활은 말해 무엇할까. 죽음을 담보로 하는 군대 생활은 하루하루 피가 마르고 밤 점호시간이면 오늘은 이렇게 목숨을 부지했구나 라며 얕은 신음소리로 하루를 마감했다.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스무 살 청년의 하루는 정체된 시간이었다.

스무 살, 돌도 씹어 먹을 우리에게 당장 고통은 총알받이의 두려움보다 배고픈 고통이었다.

일은 많은데 밥양이 부족해서 늘 배를 곯았는데 기막힌 사건들은 병사들이 메틸알코올을 마시고 사망하는 일들이었다. 메틸알코올과 에틸알코올을 냄새로 구분하기 어렵다 보니 학교 근처도 못 갔던 병사들은 용기에 적힌 글씨를 읽을 수 없어서 메틸알코올을 마시고 시체로 발견되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 기운 없을 때 막걸리 한잔으로도 힘을 얻듯이 한잔 마시고 기운 내보려다 비명횡사를 하게 되었다. 어이없는 죽음은 또 우리를 두려움이나 자괴감으로 몰아넣었다. 탈출하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죽음을 당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낙동강 유역 선착장에 일본 놈들이 사공으로 위장해서 탈출하려는 아이들을 색출해낸다. 잡히기라도 하는 날이면 바로 엄동설한에 철창에 가둬놓고 바닥에 물을 뿌려놓는다. 아침이면 꽁꽁 얼어버린 유치장 바닥, 얼음 바닥에 붙어버린 발을 떼려면 죽음만한 고통을 견뎌내야 한다. 그저 목숨이 붙어있어서 살던 날들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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