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이 화석이 된 사람들, 최영자 어머니(1949~)
그리움이 화석이 된 사람들, 최영자 어머니(1949~)
  • 김경희 작가
  • 승인 2021.05.20 10: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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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이 화석이 된 어머니 (암 투병으로 59세에 소천하시기 2년 전)
그리움이 화석이 된 어머니 (암 투병으로 59세에 소천하시기 2년 전)

가장 깊은 그리움, 가장 먼 그리움은 같은 사람을 품고 있다. 어머니, 아버지이다.

당신이 할머니가 됐어도 아직도 어머니 아버지가 꿈에 보이면 다음 날은 아침부터 설렌다는 최영자 어르신.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가 8할을 넘었다. 당신 삶 안에 들어왔던 사람들 중 굳이 저울질한다면 부모님만큼 오랜 그리움으로 남은 이는 없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장모 섬김에 마을이 감동하다.

부모님은 이제 그리움이 화석이 돼서 가슴 한편에 둥지를 틀고 미동도 하지 않는다. 아버님은 최 원동, 어머님은 정 옥자, 아버님은 군수한테 효자상도 받으셨다. 그것도 본가 부모님을 섬긴 상이 아니라 우리 외할머니인 장모님을 섬긴 상이었다. 시계도 부상으로 받고 놋쇠 밥그릇에 이름까지 새겨져 의미를 더했다. 이웃들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여자들이 시집살이로 숨 막히던 시절인데 장모님을 모시고 사는 것은 아버님의 남다른 성정이었지만 구루마에 외할머니를 태우고 링거 맞추러 읍내에 다녀오는 모습은 전래 동화 속 이야기처럼 푸근한 정경이었다.

아버지는 외할머니가 편찮으시면 구루마 바닥에 이불 깔고 할머니를 앉혀서 읍내 병원에 다녀오기도 하셨다. 그 터덜거리는 자갈길을 지나 바퀴도 말을 듣지 않는 구루마를 끌고 장모님을 모시고 병원에 다녀왔다. 우리집에서 의원까지 걸어서 족히 20리 길이다. 맨몸으로 걸어서만 가도 숨이 헉헉거리는 거리인데 구루마에 장모를 태워서 다녀오던 아버지...

외할머니는 몸이 기진맥진하셨겠지만 사위가 끌어주는 구루마에 앉아 오가는 길이 미안한 마음, 고마운 마음에 보약한 채 지어 드신 것과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아홉 살 어린 나이였지만 아버지가 할머니를 태우고 구루마를 끌고 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 모습이 작아질 때까지... 아버지의 그 뒷모습이 가슴에 화석으로 남아있다.

결 고운 어머니, 그 끝없는 사랑

어머니도 영민하고 인정이 넘친 분이었다. 어머니는 저녁이면 마을 어른들을 사랑방에 모아놓고 춘향전이며 심청전을 잘 읽어주셨다. 그것도 맨입이 아닌 어머니가 손수 어르신들 밥까지 대접하면서 마을 어르신들께 큰 즐거움을 주셨다. 집안일 돌보기도 벅찼을 어머니는 동네 어르신들 마음까지 살뜰하게 위로해주셨다.

나도 사랑방 문밖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어머니가 들려주시는 춘향전을 들었다.

“이몽룡이 광한루에 나와 그네 타는 춘향이를 보았다.

춘향이 고운 자태를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방자한테

한 소리 듣기도 했다. 둘은 그날 바로 눈이 맞아 이몽룡은

그 밤에 담을 넘어 춘향이 방으로 들어갔다.”

어르신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곤 했다. 농사일하면서 저녁이면 몸이 녹초가 된 어머니는 그 밤에 춘향전을 읽어주시며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주셨다. 간간이 나와 동생은 툇마루에 앉아 어머니가 읽어주시는 낭랑한 소리를 들으면서 꿈결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도 했다.

인품 좋은 아버지, 영민한 어머니 품에서 사랑받고 자랐다. 딸 부잣집에서 싫은 소리 안 듣고 살 수 있던 것도 부모님이 인자한 분들이라 가능했다. 사랑하는 이는 더 먼저 데려간다고 했나. 어머니는 유방암으로 59세에 돌아가셨다. 병원 한 번 가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어머니, 평소에도 분명 죽을 만큼 아픈 고통이 있었을 텐데... 젖가슴을 광목천으로 두르고 피고름을 참아내셨다.

더 이상 참아낼 수 없을 때 어머니는 쓰러졌고 그 길로 다시 일어서지 못하셨다. 내내 참아내신 어머니도 너무 가엾고 알아차리지 못한 마음에 딸로서도 너무 죄스럽고 속상했다. 어머니를 그냥 돌아가시게 했다는 생각에 오랫동안 어머니를 잊지 못했다.

외할머니는 어머니 돌아가시고 숟가락을 내려놓으셨다. 미음이라도 한술 뜨게 해드리려면 입을 열지 않으셨고 그저 입을 다문 채 눈물만 흘리셨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할머니는 밥상을 물리고 내어가라는 말씀만하셨다. 알아들을 수 없던 할머니의 말씀, 입을 크게 벌릴 수도 없을 만큼 그렇게 기력을 내려놓으면서 어머니 곁으로 가려고 결심을 하셨다. 결국 우리는 할머니의 마음을 헤아려야 했다.

딸을 유방암으로 보내고 살아가는 의미를 잃어버리셨다. 아, 할머니... 할머니는 기력이 쇠하고 정신을 놓게 되셨다. 그날도 아버지는 할머니 방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를 참아내고 계셨다. 우리는 할머니 방에서 흘러나온 냄새에 구토를 참을 수가 없어서 근처에도 가지 못했지만, 아버지는 할머니의 대소변까지 다 받아내셨다.

5일 장이 서면 쌀 팔고 마늘 팔아서 소금 절인 갈치를 꼭 들고 오셔서 할머니께 구워드렸다. 뼈를 가르고 살을 발라서 할머니 밥숟가락 위에 얹어주셨다. 지푸라기에 알알이 박힌 계란도 사 오셔서 후라이를 만들어서 외할머니께 먼저 갖다 드리셨다. 계란도 귀할 때였다. 아버지는 소나 돼지를 잡을 때도 간이나 좋은 부위는 따로 챙겨서 우리 딸들에게 먼저 맛보여주셨다. 우리 먹기 좋게 해주려고 고기에 칼집을 촘촘하게 내서 소금장을 묻혀 영자 한 입 순자 한 입 하시며 일일이 입에 넣어주셨다. 꿀맛 같았던 고기 맛은 내내 기억됐지만 아버지 그 사랑이 깊이는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50년 전 스무 살 무렵 (청춘은 조건 없이 아름답다)
50년 전 스무 살 무렵 (청춘은 조건 없이 아름답다)

아버지, 어머니는 우리 네 딸한테 자상한 기억으로만 남겨져서 그리움이 화석이 되고 말았다. 살면서 울화통이 치미는 날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참고 사셨을 어머니 생각하면 나도 진정을 시켜야 하지만 나는 어머니 따라가려면 아직 먼 길이 남았다. 그 고

단한 시절을 어머니는 어떻게 참고 사셨을까...

우리 아이들에게 내가 떠난 뒷모습이 그리움으로 오래 남을지는 미지수라

그저 어머니 그림자라도 흉내 낼 수 있다면 내 인생이 헛헛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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