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김주현 (1883~1920)

후손 김월수 (192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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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주현 묘소 앞, 후손 김월수 어르신 부부

이렇게 시작한 만세운동은 청양에서도 일어나고 공주로 확산되었다고 한다. 온 국민의 뜨거운 절규였다. 만세운동이 끝난 후 일제 경찰이 할아버지 행방을 추적해 다녔다. 만세운동을 선동한 문제 인물로 지목되어 몸을 피해 다니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간신히 목숨을 구했지만 잔인하리만큼 가혹한 고문은 피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체포되었을 때는 이미 태형 90대라는 선고가 내려진 상태였다.

아내는 할아버지 이야기가 나오면 지금도 온몸을 떨면서 일제 경찰 만행을 이야기하곤 한다. 시집오기 전 경찰서 앞에 살았을 때 농산물 공출을 안 낸 농부들을 각목으로 사정없이 때리던 일제 경찰의 모습이 눈에 선해서 지금도 울분이 치솟는다고 한다. 아내는 할아버지가 어떤 고통을 당하셨을지 짐작이 간다며 눈시울을 적신다.

90대를 맞은 할아버지. 어떻게 혼자 걸을 수가 있겠는가.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할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에게 업혀서 집에 돌아오셨다. 한 대만 맞아도 온 몸에 멍이 들 정도인데 나는 지금도 그 혹독한 고통을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뼈가 아리고 눈물이 뜨겁다는 말로 다할 수 있을까. 할아버지는 어떻게 견디셨을까. 마음이 아파서 목이 멘다. 집으로 돌아오신 할아버지는 태형의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으셨다. 매를 맞았던 자리마다 식민의 울분들이 응어리져서 풀리지 않았을 것 같다.

결국 1919년 이듬해인 1920년 할아버지는 조국의 독립을 꿈으로 남긴 채 유명을 달리하셨다. 할아버지 나이 겨우 서른일곱 살이었다. 짧은 생이 조국의 무궁화 꽃이 되었다. 오후 늦게 오므라져서 밤에 지고 다음 날 아침 새로 피어나 또 지고 또 새롭게 피는 강인한 꽃. 할아버지의 호국정신은 후손들을 통해 무궁화꽃처럼 새롭게 거듭 피어 날 것이라고 믿는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가세는 점점 기울었다. 그때 아버지의 나이는 12살이었고 고모는 9살 작은아버지는 6살이었으니 한참 아버지의 손길이 필요한 나이였다. 남편을 잃은 할머니는 온갖 고생을 다 해야만 했다. 그때는 여자의 몸으로 얼마 되지 않은 농사를 지으며 3남매를 키운다는 것이 맨발로 가시밭길을 걷는 것처럼 힘에 겨운 일이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일자리가 많고 기회가 많았던 사회가 아니었던 만큼 경제적인 어려움을 쉽게 해결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마냥 슬픔에 빠져 있을 수 없었다.

할머니는 그래도 꿋꿋하게 3남매를 키우면서 희망을 잃지 않으셨다. 아직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에게 공부를 해야 나라도 살리고 나도 살 수 있다고 하시면서 큰할아버지에게 천자문을 하루에 네 글자씩 배우라고 보내셨다. 아침 일찍 큰할아버지에게 한자를 배우고 돌아오면 그날 배운 것은 꼭 기억해야 한다고 하시며 확인하곤 하셨다.

할머니는 그 어렵고 절박한 상황에서도 미래를 예견하는 지혜를 갖고 계셨다.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실 때 그 뜻을 같이하셨던 것만 보아도 할머니의 강인함과 미래지향적인 성품을 알 수가 있다.

안중근 의사가 책 읽고 공부하지 않으면 거친 말을 하게 되니 매일 공부와 독서에 정진해 지식과 교양을 쌓으라고 명언을 남긴 것처럼 할머니도 공부가 사람됨을 만드는 기반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할머니의 교육 덕분에 아버지를 일찍 여의신 아버지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 애국심이 남달랐다.

아버지는 해방 후 지역적인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발족한 치안대 대장을 맡아 지역 일에 솔선수범하셨다. 그러다가 6. 25사변이 일어나고 아버지는 인민군을 피해 산속으로 몸을 숨겨야만 했다. 국군이 다시 청양을 탈환했을 때는 동네 사람들 일을 두 발 벗고 도와주셔서 칭송을 받기도 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하셨던 일이 다르긴 했어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없이는 선뜻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 역시도 지금이나 예전이나 호국정신이 본능처럼 드러나 숨길 수가 없다.

이제 나의 나이 아흔두 살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와 6.25 사변 거의 한 세기 동안 나라의 아픈 역사를 모두 겪고 폭풍과 같았던 시절을 체험했던 세대이기도 하다. 젊은이들이 아무리 공감을 한다 해도 폭풍과 급류 속에서 노를 잡아야 했던 우리의 절절했던 선택과 심정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어느 때는 우리가 겪은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 주었으면 할 때도 있다. 그래도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후손들이 있어서 고마운 일이다.

국가 유공자 증서
국가 유공자 증서

노무현 전 대통령 때 할아버지가 일제강점기 때 위험을 무릅쓰고 독립운동하셨던 공적을 인정받아 표창장과 국가 유공자 증서를 수여받았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관심이 없었다면 시골 어느 평범한 가정의 가장으로만 기억되었을 한 사람의 희생을 기억해 주니 말이다.

할아버지가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체포되었을 당시에 호적에 기록되었던 형벌의 내용을 청양 중학교 교사가 발견하여 보훈처에 제보하고 그 내용이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었다.

나 역시도 김대중 전 대통령 때 6.25 참전 용사로 인정받고 이명박 전 대통령 때는 국가유공자 증서를 받았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이것저것 기억하기도 쉽지 않지만, 할머니로부터 들었던 할아버지 독립운동 이야기, "사람은 공부해야 한다"며 천자문을 배우게 하셨던 할머니의 지혜로운 말씀은 화석처럼 기억에 남아 있다.

우리 집에 오는 사람들은 거실에 걸려 있는 할아버지와 나의 유공자 증서를 보고 그 할아버지의 그 손자라며 존경과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거실 한 벽면을 가득 채운 표창장과 태극기들. 아흔을 넘긴 나이에도 그것을 보고 있으면 다시 청년이 되는 것 같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셔서 얼굴도 모르고 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아서 체온을 느껴 보지도 못했지만 나는 안다. 말없이 흐르고 있는 호국정신이 할아버지의 체온이라는 것을.

3.1운동 100주년이 넘었다. 할아버지의 호국정신은 오늘도 깊고 푸른 강처럼 도도히 흐르고 있다. 소리 없는 울림, 영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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