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손에게 듣는 독립운동사Ⅰ- 숨겨진 별
후손에게 듣는 독립운동사Ⅰ- 숨겨진 별
  • 김경희 작가
  • 승인 2021.03.03 09: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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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주현 (1883~1920)

후손 김월수 (192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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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 김월수 선생님 부부, 현충원 순국선열 故) 김주현 독립 유공자 묘역앞에서

내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기억되지 않았었다. 어느 날 서류 뭉치에서 발견되어 공적조서라는 이름으로 명기되었다. 독립유공자 후손이라는 이름으로 문패를 걸고 선대 어르신의 숨겨진 독립운동으로 나라의 혜택을 받는 수혜자가 되었다. 그분들의 목숨을 건 독립운동의 발자취가 후손인 우리에게 전하는 거룩한 뜻은 조명되지 못했었다. 한 집안의 가장이며 누군가의 아들이었던 너무나 평범했던 그들의 독립운동사도 이제 광복을 맞게 되었다. 훈련된 군인도 아니었으며 20대 30대의 청춘들이 대부분이었다. 역사도 광복을 맞이하고, 숨겨진 그들의 독립운동사도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뒤안길을 따라오면 지금의 우리를 만날 수 있다. 하늘과 나무와 들판과 바람이 일제 강점기의 수탈과 탄압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데 역사의 고리는 아직 풀어지지 않은 채 한일관계의 갈등은 깊어만 가고 있다. 해방되기 전에 아픈 역사를 그대로 안고 잠들어 계신 할아버지가 더욱 그리운 나날이다.

지금 젊은 세대가 나라에 제도 개혁을 요구할 수 있고 문화의 다양성을 누리게 된 것도 할아버지 세대의 치열한 투쟁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 또한 거의 한 세기를 살아 왔지만 할아버지 세대의 독립운동이 없었다면 이렇게 주권을 행사하며 능동적인 삶을 살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숙연해지곤 한다. 그런 할아버지를 보며 아버지가 자랐고 아버지를 보며 내가 자랐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관심이 없었다면 시골 어느 평범한 가정의 가장으로만 기억되었을 한 사람의 희생을 기억해 주니 말이다.

3.1운동
3.1 만세 운동

“여보세요 김월수 씨 되십니까? 할아버지 존함이 김현수 씨 되시죠?”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왔다. 홍성 보훈지청에서 온 전화였다. 청양 중학교 교사가 자료를 찾다가 발견하게 된 할아버지의 기록 때문이었다. 긴 세월 동안 묵묵히 있었어도 조국의 혈관을 타고 흐르던 할아버지의 애국이 세상 밖으로 나오던 날이었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어린 손자가 되어 할아버지를 기억해 본다. 우리 집안에는 강처럼 흐르는 약속이 있다. 한 세기 동안 어떤 장애물이 있어도 가슴과 가슴으로 말없이 흐르고 있는 강이다. 나라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셨던 할아버지의 호국정신이 발원지가 되어서 아버지 지금의 나 그리고 손자 손녀들에게까지 유유히 흐르고 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셔서 할아버지가 직접 나에게 전해 줄 시간은 없었지만 역사의 깊은 계곡으로 굽이쳐 흐르는 마음을 남겨 놓으셨다. 할아버지의 뼛속까지 깃들었을 마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다.

내 고향 청양군 정산면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부모님이 아직도 살아 계시는 것처럼 따뜻함이 있는 곳이다. 그 따뜻함을 자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가슴에 태극기를 품고 다녔을 할아버지와 동네 어르신들의 자취가 아직도 산천초목에 남아 있다.

할아버지는 1883년에 태어나셨다. 우리가 한국사로 배워서 잘 알고 있는 한일협약부터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 그리고 1910년 합병조약 체결까지 조국의 비극을 비통한 마음으로 지켜보아야 했던 세대이다.

특히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안중근 의사의 독립운동을 뜨거운 민족애로 지켜보며 조국의 독립을 간절히 원하던 역사의 증인이기도 하다. 현대에도 젊은 세대의 고민이 있고 사회에 대한 비평이 있듯이 할아버지의 세대에는 먹고 사는 문제를 떠나서 나라의 존폐에 대한 절박한 통찰을 했어야 했다. 지금 젊은 세대가 나라에 제도 개혁을 요구 할수 있고 문화의 다양성을 누리게 된 것도 할아버지 세대의 치열한 투쟁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집 앞의 밭을 일구며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지만 3남매를 키우며 불만 없이 지내던 평범한 가정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부당한 침략은 평범한 가정의 가장이었던 할아버지에게도 태극기를 품게 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독립운동을 하셨던 일화를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해주셨다.

1919년 3∙1 운동이 있었던 해였다. 할아버지는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해 동네를 돌아다니며 정산 장날인 4월 5일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알리고 다니셨다. 만세운동의 필요성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한 사람 한 사람이 힘을 합해 열사가 되기를 당부하지 않으셨을까. 그 당시 뜻을 같이 한 동네 사람들 20명과 산 속에서 무명천으로 태극기를 만들며 만세운동을 준비하셨다. 할머니도 그때 광목을 손에 쥘만한 크기만큼 오려서 일일이 바느질로 꿰매어 태극기 모양을 만들어 주셨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을 뒤에서 묵묵히 돕던 할머니 같은 분들이 계셔서 거국적인 거사가 가능했을 것이다. 정산의 어르신들 모두가 독립운동가였다. 산 속에서 태극기 한 장 한 장 색칠하고 만들었던 그 분들의 결의가 고향 산천에 깊은 울림으로 남아 있다.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해 만세운동을 준비할 때 그 벅찬 마음과,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함과, 식민의 울분들이 복잡하게 엉켜 고뇌했을 할아버지와 한마음이 되어 그날의 고뇌를 같이해 본다. 한편으로는 얼마나 두려웠을까. 만세운동이 성공해도 아니면 실패를 해도 일제 경찰의 가혹한 보복을 각오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1919년 4월 5일 정산 장날이었다. 할아버지와 동네 사람 20명이 위험을 감수하고 준비했던 만세운동이 있는 날이었다. 면사무소 앞으로 모여들었다. 한 명 두 명 삽시간에 모여든 사람들은 7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지역적인 인구를 추측해서 생각해 보면 거의 동네 사람 모두가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그만큼 할아버지와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선도자들의 시대를 분석한 전달력과 각자의 삶을 담보로 한 노력이 있어서 가능했을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같이 준비했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고 일제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하게 총을 쐈다고 한다. 그러나 총에 맞아 쓰러지는 사람들이 있어도 뜻을 굽히지 않는 독립 시위대를 막을 수 없었다.

비명과 같은 절규가 대한독립 만세로 이어졌다. 귀에 들리는 듯하다. 정산면이 대한독립만세라는 천둥과 같은 소리로 가득 찼으리라. 하늘의 뜻으로 울려 퍼진 소리였다. 젊은이들은 영화의 한 장면으로 그 당시 절박하고 처참한 장면을 간접 경험 해 봤을 것이다. 나 역시도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지만 그날의 비장함을 온전하게 알 수가 없다. 목숨을 내놓고 총 앞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던 의지를 어떻게 다 공감하며 이해할 수 있으랴.

지금도 정산 고향에 가면 할아버지가 만세를 외치는 소리와 동네 어르신들의 만세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마음이 경건해 질 때가 있다. 개인으로서 영리를 취하는 삶 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삶을 더 간절하게 원했던 할아버지의 뜻이, 목숨까지 아끼지 않았던 그 뜻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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