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천에 핀 목단 꽃 (2회)
무명천에 핀 목단 꽃 (2회)
  • 김경희 작가
  • 승인 2021.01.15 15: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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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심 어르신 1945년

55년 전 우리 부부는 전라도 고흥의 외딴 시골 마을에서 이불보따리 하나들고 터덜거리는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순천역으로 와서 서울과 여수를 잇는 전라선 기차에 올라 서대전역에 내렸다. 그 날은 내 생애 처음으로 기차를 타본 날이었다. 창밖으로 바라본 선로 주변이 허허벌판이라 간간이 보이는 시골 동네가 내가 처음 본 다른 세상이었다. 다시 버스를 탔다. 차창에 비친 내 얼굴은 잔뜩 겁먹은 얼굴이었다. 남편도 눈을 지그시 감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대전에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달랑 당숙뿐이었는데 남편이 대전에서 한번 살아보자며 내 손을 잡고 그 낯선 땅을 찾았다.


약혼 기념사진
약혼 기념사진

여섯 손가락, 우리 6남매

소제동에서 겨우 월세 방을 얻고 대전 땅에서 일가를 이루기 시작했다. 대전이 낯선 곳이라 남편이 퇴근하는 시간이면 문밖에서 기다리다 저 멀리서 남편 발자국 소리가 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외롭고 힘들어 의지할 사람이 남편밖에 없었다.

우리 부부는 6남매를 낳았다.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 나도 엄지부터 약지까지 깨물면 몸서리 쳐질 만큼 아프다. 큰 딸은 결혼해서 가정 꾸리고 있고 둘째와 넷째도 아픈 손가락이다. 셋째 연*이는 서른 살 무렵에 우리보다 먼저 하늘나라로 떠났다.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더니 문득문득 떠오를 때는 심장에 바늘이 꽂힌 것처럼 그 고통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우리는 다들 가슴에 대못 하나씩 박은 채로 살아간다.

같이 살고 있는 둘째 딸 연*이는 쉰 살 인데 정신지체를 앓고 있어서 나만 찾는다. 이제는 다 보듬고 살아가는 힘과 내성이 생겼다고 할까. 셋째 연*이가 투병 생활하다 먼저 떠나면서 가슴 한 편의 돌덩이로 남았다.

받아들이는 과정은 무수한 시간을 담보로 하고 너무 힘들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마루를 닦는 큰 딸 순*이 등에 재*이가 올라 앉아 있었다. 재*이는 누나랑 말 타기 놀이를 했겠지만 어린 순*이도 힘들었을 텐데 군말 없이 엄마 노릇을 하고 있었다.

1978년, 신탄진으로 내몰리듯이 왔다

가양동에 살면서 바느질도 하고 잡일을 하면서 돈을 좀 모았다.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악착같이 벌었다. 우리는 옷 한번 제대로 사 입지 못하고 안 먹으면서 돈을 모았다. 친정 당숙이 자기한테 돈을 맡기면 이자를 불려서 목돈으로 만들어준다는 말에 성큼 돈을 맡겼다.

우리가 정직한 사람이라 남들도 그럴 것이라고 믿었다. 내 삶이 평범하니 대단한 사람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남 뒤통수를 치는 나쁜 사람도 만나보지 못했다. 그래서 믿고 맡겼다.

돈을 맡기고 우리는 보기 좋게 사기를 당하고 말았다. 돈을 돌려받을 수도 없었다. 안 입고 안 먹으면서 삯바느질해서 번 돈이다. 우리한테 목숨 값 같은 돈이었다. 우리 부부는 망연자실 한 채 넋을 놓고 있었다. 아이들 까만 눈망울을 보고 있자니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1978년도에 우리는 그렇게 쫓겨나듯이 가양동을 떠나 신탄진으로 터전을 옮겼다.

신탄진역 맞은편 석봉동 신탄제일교회 밑에 초가집을 하나 겨우 얻었다.

다섯째 제*이 낳고 남편은 인천으로 가서 일을 하게 됐다. 남편도 인천 가서 몸 하나 건사하면서 다시 일어날 계기를 마련하느라 열심히 살았다. 막일을 하고 건설 현장에서 세칭 노가다 라고 하는 일들을 했다. 혼자 객지에서 살아가는 남편이 너무 안쓰러웠지만 나는 나대로 신탄진에서 아이들을 건사하면서 사는 하루하루가 힘겨웠다.

신탄진시장에서 노점을 열고 쥐포나 멸치를 팔았다. 시장 한 귀퉁이에서 자리를 잡고 장날이면 포대기에 아이를 업고 나왔다. 손님들이 오면 바닥에 아이들을 누여놓고 장사를 했다. 시장에 모인 사람들은 다들 전쟁터에 모인 사람들 같았다. 하나라도 더 팔아야 하고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했다. 그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나도 살아나야 했다. 거친 날들의 하루하루가 지났다. 살아내야 한다는 그 마음 하나만으로 버텼다.

혼자서 아이들을 키웠다. 남편도 나도, 꾀를 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남편은 인천에서 막 일을 하다가 막내아들을 낳은 희망에 아예 인천 일을 정리하고 신탄진으로 내려왔다. 남편은 내가 장사하던 노점상의 물건을 떼어다 주면서 같이 일을 하게 됐다. 막내 재*이가 태어나면서 우리 부부는 다시 함께 살게 되었고, 두 주먹 불끈 쥐며 다시 힘을 얻었다.

1985년, 대화동 공단에서 생산직 노동자로 출발

“순*이 엄마 시장일 말고 공장에서 일하면 어때? 힘은 들어도 월급 따박따박 나오는데”

신탄진시장에서 노점상을 하고 있을 때 지인이 대화동 공단에 있는 공장을 소개했다.

재*이 업고 시장에서 난전을 펼치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이웃 분이 추천해 준 것이다.

나도 노점상 일이 쉽지 않고 하루 벌어 살다보니 돈도 모이지 않아서 궁리하던 차에 취직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재*이가 4살 때였다.

몸이 아픈 남편이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나는 공장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가장이 되어 세상으로 나가는 출발이었다.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남편 건강이 좋아지기를 바랐고 우리 아이들 먹이고 입히는 것이 내 인생의 전부였던 시절이다.

1990년 3월 30일에는 입사 후 5년 만에 근면성실상도 받았다. 2교대 주·야간 근무를 하는데 1주일은 주간, 그 다음 주는 야간으로 교대근무를 했다. 일요일 하루 휴무였지만 아이들 챙기고 집안일을 하면 제대로 쉴 수도 없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다시 교대근무를 나갔다.

2001년, 목상동 3공단에서 청소노동자로 근무를 시작하다

대화동 공단에 있는 공장에서 14년 근무하고 IMF로 인해 명예퇴직 후에 2년 동안 또 다른 일자리를 구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청소 일하면서 2001년 4월 11일부터 2020년 6월 30일까지 약20년을 근무했다. 대화동 공장에서 근무할 때도 재*이 학교 가느라 두 번 결근하고 한 번도 결근이 없었다. 청소 일을 할 때도 나는 결근을 안 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가진 인생의 무기가 그저 성실하고 정직한 것이라 한눈 팔 일도 없었고 묵묵히 책임을 다했다.

그러던 2005년도에 기막힌 일로 나는 결근을 하게 되었다. 바로 셋째 딸 연*이와 영영 이별하는 날, 나는 결근을 했다. 우리 딸을 그렇게 황망하게 보냈다.

1994년, 우리 집이 생기다. 그날의 감격

셋방살이 하다가 첫 집 덕암동 신축빌라로 이사를 왔다. 그날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눈을 감으면 모든 게 꿈처럼 사라질 거 같아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우리는 결혼 후 30년 만에 내 집 마련하고 지금 26년째 살고 있다.

나는 그때 다니던 공장 동료들을 초대해서 집들이를 했다. 작은 집이지만 너무 행복해서 갈비도 재워서 내놓고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잡채도 묻혀서 상위에 올렸다.

세상을 다 가진 거 같아서 하루 종일 웃고만 다녔다. 정말 행복했다

지금은 남편과 나, 연*이와 재*이랑 같이 사는 집, 몸이 안 좋은 딸들을 챙기고 있지만 이사 갈 걱정 없이 우리 네 식구 살고 있어서 정말 행복하다. 설거지는 우리 재*이 담당이다. 풍족하지 않지만 네 식구 사는데 부족하지 않게 살고 있어서 우리 막내아들 재*이에게도 덜 미안하다. 우리가 불편하면 재*이가 또 우리 걱정을 해야 하는데 이만큼이라도 살고 있어서 한 시름 놓았다. 아들 내려올 때 미리미리 맛난 음식도 만들어 놓을 수 있는 건강도 따라주고 살림의 여유도 있다. 먹거리를 사러 시장도 마음껏 볼 수 있어서 고생했던 세월을 원망하지 않아도 된다.

2019년, -감격 또 감격, “우리 아들 박사 됐어요.”

재*이는 실업계 고교 졸업 후에 주경야독하면서 2년제 대학 다니고 4년제를 마쳤다.

2011년 2월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공부를 해보겠다더니 기어코 2019년 2월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우리 부부는 재*이 박사학위 받던 날 서로 사각모를 나눠 쓰고 정말 기뻐했다. 아들이 박사가 되다니 더 이상 부러울 게 없었다.

딸들을 제대로 공부를 많이 못 시킨 것이 한이 되고 아쉬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데 우리 아들 재*이가 마음을 달래주었다. 기특한 우리 아들 생각하면 밥 안 먹어도 배부르다.

재*이가 누나들을 챙겨야 하는 부담을 짊어지게 하는 것 같아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바람이라면 뜨끈한 청국장에 밥을 비벼 배부른 점심을 먹고 잠시 눕고 싶다. 그 시간을 놓칠세라 창문 틈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데려오는 졸음과 만나는 것이다. 한낮의 졸음을 따라 저 멀리 고향 마을 고흥에 다녀오고 싶다. 어머니 아버지 먼저 떠난 우리 딸 연*이, 그리운 이름들을 만나는 단꿈을 꿔본다. 멀리도 왔다.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할지 알 수 없지만, 그저 오늘도 따뜻한 아랫목에서 나른한 낮잠을 청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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