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천에 핀 목단 꽃 (1회)
무명천에 핀 목단 꽃 (1회)
  • 김경희 작가
  • 승인 2021.01.06 23: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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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심 어르신 1945년

55년 전 우리 부부는 전라도 고흥의 외딴 시골 마을에서 이불보따리 하나들고 터덜거리는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순천역으로 와서 서울과 여수를 잇는 전라선 기차에 올라 서대전역에 내렸다. 그 날은 내 생애 처음으로 기차를 타본 날이었다. 창밖으로 바라본 선로 주변이 허허벌판이라 간간이 보이는 시골 동네가 내가 처음 본 다른 세상이었다. 다시 버스를 탔다. 차창에 비친 내 얼굴은 잔뜩 겁먹은 얼굴이었다. 남편도 눈을 지그시 감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대전에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달랑 당숙뿐이었는데 남편이 대전에서 한번 살아보자며 내 손을 잡고 그 낯선 땅을 찾았다.


약혼 기념사진
약혼 기념사진

1945년, 고흥반도 시골마을 순둥이

전라남도 고흥 시골마을이 고향인 나는 1945년 해방둥이로 태어났다. 내 나이 스물한 살, 남편 나이 스물여덟에 결혼을 했다. 나는 세상물정 모르는 순둥이였고 남편도 당시는 노총각이었지만 순진하기 짝이 없었다. 세상 때 안 묻은 두 사람이 신랑 각시가 되었다.

다들 부모님이 결혼하라고 하니 시집 장가를 가던 시절이다. 자기 결정권이라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좋은지 뭔지 알아?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지. 낯선 만남 어설픈 초례상 앞에서 신랑 각시 약속을 하고 부부가 되었다. 볼에 살이 올라 포동포동 한 뺨에 연지곤지를 찍었다. 발그레한 뺨이 수줍었던 스물한 살의 연심이는 인생이라는 한바탕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멀리도 왔다. 70고개 넘은지가 한참 되었다.

시골 부락에는 열 댓 호 남짓 초가집이 듬성듬성 둥지를 틀고 있었다. 저녁이면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밥 짓는 냄새를 맡으며 짧은 하루를 보냈다. 전기불이 없으니 시골 부락은 쉬이 어둠이 내려 겨울이면 6시만 되도 깜깜했다. 24시간을 다 쓰지 못하고 어두워지면 시간은 그대로 멈췄다. 그런 시골에서 자라 큰 애기가 되었고 친정 이모님이 중신을 섰다. 중매쟁이들이 중신할 때는 신랑 자리집이 그런대로 먹고 산다며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입으로 보시를 했다. 일흔이 넘은 우리들이 다들 모이면 9할은 “우리 그 때는 다들 속아서 시집 왔었어” 라며 자조 섞인 말들로 지난 세월을 달래곤 한다.

나는 고향에서 학림초등학교 다닐 때 한 시간 정도를 걸어 다녀야했다. 물론 지금은 다시 인구감소로 학림초등학교는 폐교되었다. 1950년도에는 시골아이들은 누구나 겪었던 불편한 통학 길이었다. 비라도 쏟아지는 날이면 낡은 고무신 안에 빗물이 고여 몇 번씩 미끄러지면서 학교를 가야했다. 그래도 학교 오가는 길은 차라리 속은 편했다. 못 견디게 불편했던 발걸음은 사실 딴 곳에 있었다. 바로 학교 월사금 받으러 아버지에게 가는 길이었다.

1957년, 어린 내 눈에 비친 어머니의 고단한 삶

아버지는 작은 어머니를 보셔서 작은 어머니와 함께 계셨다. 돈 받기도 힘들지만 우리 어머니 생각을 하면 어린 마음에 작은 어머니를 곱게 쳐다볼 수도 없었다. 내키지 않은 발걸음으로 작은 어머니 댁에 도착해서 아버지에게
"아버지 월사금을 낼 때가 됐어요.“

모기만한 소리로 말을 꺼내면

“없다”

라시며 즉답을 하셨다.

할 수 없이 따가운 뒤통수만 남기고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왔다. 가는 길도 내키지 않았지만 돌아오는 길은 더 씁쓸했다. 결국 월사금은 어머니의 몫이 되었다. 아버지가 야속했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우리 엄니들은 다들 간 쓸개를 뒤꼍 흙 담 밑에 누여놓던지 텃밭 밭고랑에 묻어둬야 했다. 학림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두원양재전문학교에 가서 동무들을 만나면서 비슷한 처지를 서로 위로했다. 중학교를 다닐수 없던 우리들이 열다섯 살 무렵에 집안 살림이 비근한 동무들과 같이 두원양재전문학교에 다녔다. 60년 전 그날의 기억은 흑백사진 한 장으로 남았지만 앞줄 왼쪽 두 번째 선심이 얼굴은 그대로다. 꽃무늬 포플린 치마를 입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영락없는 시골내기 순둥이 모습이다.

두원양재전문학교 졸업기념
두원양재전문학교 졸업기념

1967년, 순천발 전라선 열차로 대전에 첫발을 디디다

우리는 1966년 결혼하고 한 마을에서 큰 형님과 1년을 살았다. 뻔한 살림에 그저 농사나 짓고 하루하루 입에 풀칠을 했다. 작은 농사를 지어 형제들이 나눠 먹으려니 갑갑한 노릇이었다. 어느 날 대전에 사는 당숙이 남편한테

“자네 대전 와서 한번 살아보면 어떻겠나.”

한마디 툭 던진 말에 남편은 대전행을 결심했다. ‘그래 거기가 여기보다 낫겠지’ 라는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22살의 나에게는 의지가 없었다. 남편의 결정에 따라 나는 뒤를 따랐다.

결혼하고 1년 뒤 전라선 열차를 타고 서대전역에 내리며 기나긴 대전 살이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정착한 곳은 대전 소제동, 가양동이었다. 그곳에서 약 11년을 살다가 신탄진으로 이사와 42년을 살았다. 1967년 전라도 촌사람 둘이 이불 한 채 옷가지 한 보따리 냄비 하나 들고 타향살이 장도에 올랐다. 바리바리 챙겨올 것이 있었다면 아마도 고향에 눌러 앉았을 거다. 맨 바닥에서 시작한 우리부부, 고생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순천 괴목 구례 곡성 남원 임실 전주 삼례 이리(익산) 함열 강경 논산을 거쳐 서대전역에 내렸다. 낯선 땅, 난생 처음으로 2층 집도 보았고 밤에는 불빛도 환한 시가지도 보았다. 물론 당시 대전도 그다지 볼거리도 없었지만 전라도 고흥 시골에서 올라온 내 눈에는 그래도 신기한 도시였다. 우물안 개구리 눈에는 뭐든 놀라웠다.

우리는 대전에 와서 대전역 뒷동네인 소제동에 월세 방을 얻어서 살았다. 소제동은 당시 판자촌 일색이었다. 처마가 머리끝에 닿는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것 같은 초라한 집에 세를 얻으러 다녔다. 대전역 뒷동네라 달동네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월세 방을 얻으러 이집 저집 다니며 집 없는 설움을 여실히 경험했다.

1970년, 좌충우돌 소제동 가양동에서 서글픈 타향살이

대전에 도착해서 먹고 살기위해 별의 별 일을 다 해보았다. 양심에 가책이 안 된다면 마다하지 않았다. 바느질부터 시작해서 노점상, 공장 일, 청소노동자로 근무를 했다. 남들이 꺼리는 일, 자존심에 흠집 나는 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건 사치였으며 척박한 땅에 우리 부부 달랑 남겨져 살길을 찾아야 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부끄럽지 않았다. 그 자존심으로 살아냈다. 우리는 세 번째 만나는 날 결혼을 했는데 천생연분이 맞는 모양이다.

가양동에 살 때 남편은 말 구르마 일을 계속하고 나는 노점상을 했다. 가진 것이 없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리어카에 쥐포 멸치 등을 팔았다. 오정동 농수산물시장에서 쥐포와 멸치를 리어카에 싣고 와서 판매를 했다. 아이를 업고 걸리고 돌이켜보면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날들을 보내면서 여기까지 왔다. 몸이 부서져라 일을 했던 그 날들이었다. 남편도 나도 아이들을 건사하기 위해 매일 매일 피땀을 흘린 시간이었다.

희망도 없던 시절이라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몰랐고 뒤돌아서면 한 뼘씩 자라는 아이들을 보면서 숨 한번 돌리고, 살 이유를 찾았었다.

대전으로 와서 남편은 정동 대전역 앞에서 구루마로 짐을 실어 나르는 마루보시 일을 했다.

마루보시는 지금의 택배 회사의 전신격인 업인데 지금은 차량으로 배송을 하지만

1960년대는 말이 짐을 날라주는 수단이었다.

교과서에나 나오는 운송수단인 말을 끌면서 비빌 언덕 없는 대전에서 둥지를 틀었다.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이 힘겨운 시절이었다.

나도 손 놓고 남편만 바라볼 수 없어서 삭 바느질을 하면서 살림을 도왔다.

축구공 꿰매는 일거리도 받아서 하루 종일 쪼그리고 앉아 바느질을 했다. 실은 뻣뻣하고 가죽은 말은 안 들어서 밥 먹고 사는 일이 그렇게 힘든 줄 미처 몰랐다.

고향에서 열다섯 살 때 두원양재전문학교을 다녔는데 동무들과 같이 중학교 과정을 배웠지만, 맨 몸으로 할 줄 아는 게 바느질 밖에 없어서 처음 시작한 일이 바느질이 되었다. 아는 사람 없는 소제동에서 바느질거리를 찾아다니며 세상과 맞서게 되었다.

남편도 말 구루마를 끄는 일이 낯선 일이라 매일 밤 피곤에 지쳐 곯아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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