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애일 어르신 (1938~)

아침 산행 길에, 형형색색 단풍 길을 지나며 감탄을 자아냈다. 오래전 그 시절은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시절이라 계절이 오가는 길목에 서 본 기억도 희미하다. 철지난 낙엽이 뒹굴면 ‘겨울이 오겠구나’ 한숨 쉬며 가을이 지난 흔적도 찾지 못했다. 이제 젊은 날의 그 척박했던 힘겨움이 싹이 되어 눈과 마음이 같은 생각을 하는 안락한 일상을 만났다. 80년이 어느 틈에 내 곁을 스쳐 지났는지 분간이 안 되는 때다. 성실한 소목수 였던 남편과의 60년도 찰나의 순간이었다. 고단한 시절을 뒤로하고 따뜻한 숲을 이루며 살고 있다. 살다보니 이렇게 고운 날을 매일 보듬고 가는구나.


아이들과 함께
아이들과 함께

아이들 키울 땐 남편 도시락까지 합쳐 아침이면 도시락 여덟 개를 싸서 들려 보냈다. 새벽 닭 우는 소리에 일어나 양은 도시락에 기껏해야 김치 반찬이지만 밥이라도 꾹꾹 눌러 담아 보내고 싶은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르며 도시락을 쌌다. 차곡차곡 얹어놓으면 하나씩 챙겨서 나갔다. 힘들어도 도시락 들고 나가며

“다녀오겠습니다.”

그 말 한마디에 기운이 솟고 우리 아이들 뒤통수를 보면 밥 안 먹어도 배가 불렀다. 그렇게 아침나절을 보냈다.

남편은 고등학교 때까지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지만 어려운 집안의 가장이라 대학을 포기하고 소목(小木)의 길에 들어섰다. 어려서부터 독립적으로 성장한 사람, 우리 아이들에게도 고등학교까지만 지원해주고 나머지는 알아서 인생을 개척하라고 아이들에게 선언을 했다. 큰 아들 공부 잘해서 서울 일류대에 갈수 있었는데 충남대 장학생으로 진로를 바꾸면서 3일 동안 입 한 번을 떼지 않는데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가능성 있는 자식한테 무조건 다 주지 못하는 애절한 부모 마음을 1할이라도 알아차릴까? 아니 모른다.

어르신들 계시니 매끼니 챙겨드려야 하고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매일이 분주하고 하루도 수월한 날이 없었다. 7남매 키우다 보면 이러 저런 일들이 다반사다.

내 일상이 대단한 성과를 내는 일은 아니었지만 새벽부터 밤까지 종종걸음으로 식구들을 챙겨야하는 조금은 고된 나날들이긴 했다. 시부모님 봉양에 7남매 건사, 염소도 키우고 산에 나무하랴 쌀 좀 싸게 사겠다고 억척을 부리며 역전시장까지 서너 시간 걸려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억척을 떨었다. 아이들도 엄마 일손 돕는다고 산에 나무하러 다니기도 했다. 시골 살이가 아니었는데도 우리 아이들은 산에 오르며 나무를 해오곤 했다. 언짢은 기색 한번 안내며 엄마 일도 잘 도왔다. 다들 말끔하게 잘 생긴 우리 아이들, 시골 아이들 마냥 학교 다니면서 산에 가서 나무도 해서 짊어지고 내려오고 어지간한 길은 걷고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아이들한테 좋은 본이 되려고 우리부부는 애를 썼고 아이들 보는 앞에서는 절대 싸우지 않았다. 차라리 이불 속에서 싸웠다. 가끔씩 아이들이

“엄마, 다른 집 엄마 아버지는 싸움도 잘 한데 우리 집은 싸우는 거 한 번도 못 봤는데”

어려운 살림에 싸울 일 없는 부부가 어디 있을까. 참고 인내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아이들 앞에서는 싸우지 말자고 남편과 약속을 했다. 서로 그 약속을 지키려고 애를 썼다.

인생의 불청객들

그렇게 참고 인내하는 시간 속에서 몸은 속앓이를 하나보다. 나도 고단한 일상을 한고비 넘기면서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을 하고 40대의 후반을 맞이했다. 처음에 놀랍고 두려움이 왜 없었을까.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하느님께 물었다. 내가 왜 이런 병과 만나야 하는지.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고 보면 누구나 지나는 통과의례 같지만 어쨌든 당사자와 가족은 두려움과 한번은 싸워야한다. 우리 아이들 그 중 내 마음의 가장 큰 자리, 우리 막내딸 금옥이, 내 자랑이며 마음 한구석의 그리움이 배인 딸이다. 수녀가 된 우리 막내. 대학까지 잘 다니던 아이가 어느 날 아침

“엄마 10시에 수녀님들 집으로 오실 거예요.”

“그래? 어쩐 일로 오신다니”

“음., 엄마 저 수녀원 가기로 했어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난데없는 말에 무슨 말인가 의아했더니 금옥이는 수녀가 되기로 결정을 했단다. 아버지 성질을 아니까 미리 얘기 안하고 그 날 맞닥뜨리기로 한 것이다. 나는 믿음이 있어서인가 조바심은 없었다. 금옥이 대학교 4학년 때였다. 한창 예쁘고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부풀던 그 때. 10시에 정말 수녀님 세분이 오셨다. 수녀님들을 보면서 금옥이가 한말이 사실 이었구나 실감을 했다. 순간 정말 수녀가 되려나 잠시 마음을 추스르며 수녀님들을 맞이했다. 얼굴 고운 수녀님이 미리 짐작하고 우리부부 마음을 편안히 해주려는지 활짝 웃으시며

“저도 7 남매에요, 제가 금옥이 꼬셨어요, 걱정 마세요”

수녀님의 넉살에 우리도 마음이 그만 녹아내리고 믿어졌다. 본인이 금옥이 꼬셨다고 하니 어린 딸을 혼낼 수도 없고 걱정 말라니 그러마해야지 어쩌겠는가. 그래도 듬직한 수녀님을 보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기는 했다.

믿음의 가정에 자녀 한 명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7남매들 두었으니 각자 다양한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다 성장하고 일가를 꾸리고 자손들이 수십 명 모이면 밥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 지난 시간을 몇 갑절로 보상받는 기분이다. 영옥이는 우리 아이들 중 돌연변이처럼 어려서부터 활동 많고 자기주장이 뚜렷했다. 어릴 때 동네에서도 마이크 잡고 방송하던 아이라 커서 뭐가 될까 궁금했는데 될성부를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사회활동을 많이 하는 딸이라 염려와 기대가 항상 따라다닌다. 노사모에서도 일하고 아름다운 가게에서도 본부장으로 일했다. 이젠 대전시 특보로 일하고 있다. 고난이 유익이라고 영옥이도 평범한 주부였지만 손녀딸이 장애진단을 받으면서 충격이었고 당찬 우리 딸이 사회의 억울함과 맞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손녀딸은 내 걱정과는 달리 건강하고 밝게 성장해서 어찌나 감사한지 모른다. 건강하고 밝은 가정 안에서 성장한 덕분이다. 영옥이가 아이 낳고 늦게 공부를 시작하면서 결혼 후에 방통대에 다니고 대학원까지 졸업하는 과정에 우리 집에서 아이들을 돌봐주었다.

딸이 열심히 해보겠다는데 만류하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 아이들을 건사해주며 딸아이가 만학도로 공부하는 여건을 만들어 준 것이 부모 노릇 한 거 같아 오히려 뿌듯했다. 우리의작은 도움으로 딸이 사회에서 자기 목소리 내며 하고 싶은 일하게 해주는 기반이 되었다면 그것으로도 감사하다.

지난 아픔은 추억으로 묻다.

팔순 기념이라고 가족들과 대만여행도 다녀왔다. 시아버님 대단한 분이라 젊은 시절 해외 다니시며 가족들 애도 많이 태우셨는데 대만도 시아버님이 계시던 곳이다. 그곳을 우리 아이들과 함께 여행 하면서 옛일을 기억했다. 7남매 다들 바쁜 아이들이 모두 모여서 가까운 곳도 아니고 대만까지 다녀왔다. 너무 고맙고 감사했다. 우리가 돌아오고 바로 다음 날 대만에 엄청난, 진도 7이 넘는 지진이 있었다. 간담을 쓸어내리며 무사히 여행을 다녀오고 그 많은 자녀들이 함께 시간을 내서 나의 팔순을 축하해주어 나는 참으로 복이 많은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날의 고생이 다 씻겨나가는 마음이었다. 시아버님과의 추억도 같이 떠올리며 지난 감회에 젖었다. 스물둘에 시집와 무섭고 까다로운 시아버지. 그야말로 시아버지 시집살이를 하면서 한숨과 눈물이 떠나지 않았지만 그 고단한 시절 덕분에 더 큰 어려움도 거뜬히 이겨내는 안나가 되었다. 때마다 챙겨주는 자식들이 있어 부러울 게 없다. 이젠 우리 3남4녀, 성실한 소목이었던 남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정직한 목재, 기교를 부릴 수 없던 소목수였던 남편, 성실과 솜씨로 인정받는 장인이었다. 우리 부부는 늘 “최고 좋은 상은 개근상”이라며 몸이 아파도 결석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걸어서 한 시간씩 학교를 다녔으니 어린 초등학생에겐 멀고 힘든 등굣길이었지만 아이들이 군말 않고 7남매 모두 고등학교까지 12년 개근을 하며 성실하게 학교생활을 해줘서 대견하고 감사하다. 노년의 소일은 발걸음이 가볍다. 지금은 말 그대로 일이 없다 없어.

인생이 덧없다 하지만 혼자가 둘이 되고 둘이 아홉이 되었다. 명절이면 방마다 가득 들어찬 우리 손주들 웃음소리 들으면서 헛살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적잖은 위안이 된다. 소복이 눈쌓인 따듯한 겨울을 기다려본다.

7남매
박애일 어르신과 7남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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