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애일 어르신 (1938~)

아침 산행 길에, 형형색색 단풍 길을 지나며 감탄을 자아냈다. 오래전 그 시절은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시절이라 계절이 오가는 길목에 서 본 기억도 희미하다. 철지난 낙엽이 뒹굴면 ‘겨울이 오겠구나’ 한숨 쉬며 가을이 지난 흔적도 찾지 못했다. 이제 젊은 날의 그 척박했던 힘겨움이 싹이 되어 눈과 마음이 같은 생각을 하는 안락한 일상을 만났다. 80년이 어느 틈에 내 곁을 스쳐 지났는지 분간이 안 되는 때다. 성실한 소목수 였던 남편과의 60년도 찰나의 순간이었다. 고단한 시절을 뒤로하고 따뜻한 숲을 이루며 살고 있다. 살다보니 이렇게 고운 날을 매일 보듬고 가는구나.


박애일 어르신
박애일 어르신

전염병으로 멍석에 말려간 아버지, 상여가 가당키나 한가

하루도 놓지 않았던 하느님의 딸. 질곡의 시간을 거쳐 따뜻한 뜰에 둥지를 깊이 내렸다. 빨간 우체통 집의 안주인으로 60년이 되었다. 충남 보령 도화담리가 고향인 나는 죽산 박씨로 천주교 성인품을 받아 죽산 성지에 묻힌 선조가 있다.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린 핏줄이었다. 고향은 자갈밭이 많던 시골이라 농사도 썩 재미없어서 다들 어렵게 살았다. 우리 집도 예외일 수 없었다. 어린 시절 가장 오래된 기억의 끈은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그때만 해도 동네에 장티푸스가 돌면 전염병이라 4,50대 장정들도 맥을 못 추고 픽픽 쓰러졌다. 우리 집도 순식간에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를 잃었다.

까마득한 기억 속의 그 날 밤. 돌아가신 아버지를 하얀 홑청으로 덮고 멍석을 말아 장사를 치러주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은 너무 처량했다. 상여가 가당키나 한가. 잠자리에 누웠을 무렵, 밖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그 칠흑처럼 어두운 밤에 동네 장정들이 아버지를 멍석 말아 지게에 지고 나갔다. 전염병이라 동네 초상을 치를 수 없어서 쉬쉬하며 아버지를 그렇게 보냈다. 남편의 마지막 가는 길에 곡소리도 크게 낼 수 없었을 어머니의 그 소리 없는 통곡을 우리가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문풍지에 침 발라 구멍을 뚫었지만 칠흑 같은 어둠에 묻혀 어렴풋한 그림자만으로 아버지를 보내드렸다. 다음날 아침 지난밤의 그 슬픔과 두려움은 누워계시던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그 사실로 다시 확인했다.

형제들이 한 달 사이로 돌아가셨으니 논마지기 다 팔고 밭뙈기 조금으로 연명하면서 집안이 망했다. 그전에는 먹을 만치(만큼) 먹고 살았는데 두 형제분이 한 달 내 3월 4월에 돌아가시니 집안에 사람들 발길도 뚝 끊기고 꼴이 말이 아니었다. 어처구니없이 그렇게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집안은 당연히 기울고 어머니는 남편 없이 혼자서 우리 4남매를 키우시느라 가시밭길에 들어섰다. 그래도 아버지와의 그 슬픈 이별을 달래주기라도 하듯이 어머니는 아흔이 넘어서까지 내 곁에 계셔주셨다. 그리고 늘 나에게 “안나는 나이 들어 큰 복을 받을 거다”라며 위안의 말을 해주셨다.

생존을 위한 어머니의 분투

어머니는 이것저것 생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은 마다하지 않으셨다. 감을 우려서 시장에 내다 팔 때마다 따라다녔다. 나도 조막손으로 어머니를 돕겠다고 감도 만지작거리며 광주리에 담을 때 손도 거들었다. 어머니께서는 옹기장사도 하셨다. 살림에 보탤 수 있으면 뭐든 열심히 하셨다. 둘째 오빠가 여남은 살(열 살이 조금 넘은 나이) 됐을 때인가 어머니는 옹기를 머리에 이고 둘째 오빠는 지게에 지고 그릇을 팔러 나갔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후 돌아온 오빠는 눈물자국으로 얼굴이 때꾼했다. 어머니가 옹기 팔러나가는 길에 기막혔던 일을 들려주시며 한숨을 내쉬셨다. 어머니와 오빠는 옹기가 무거워서 가는 길에 잠시 쉬어 가려고 지게를 세워두었다. 오빠는 의젓하다 해도 열 살 조금 넘은 아이다. 지게 다루는 것이 서툰 것은 당연하다. 잠시 앉아 쉬고 있는데 ‘와장창’ 그릇 깨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지게는 엎어져있고 그릇들은 부서져 여기저기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어머니 어떡해요 죄송해요 제가 그릇을 깼어요. 이제 어떡해요” 오빠는 속상하고 죄스러운 마음에 두 다리를 쭉 뻗고 대성통곡을 했다. 어머니는 널 부러진 옹기 조각에 애가 탔지만 망연자실 한 채 울고 있는 아들을 보며 어머니 마음이 더 아팠을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루하루 애가 타고 살얼음판을 건너며 그 세월을 견뎌냈다.

큰 오빠는 집안의 가장이라 장가도 서둘렀다. 올케 시집 왔을 때 난 다섯 살 정도 되었다. 올케도 겨우 열여섯 살이었지만 나는 딸 같은 시누였다. 올케가 반갑고 신기해서 올케가 어머니와 얘기라도 나누고 있으면 옆에 궁둥이를 들이밀고 앉아서 정을 느끼곤 했다. 어려운 살림에 어린 시절이라 나를 챙겨주는 어여쁜 이가 또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됐다. 올케의 존재는 그렇게 무게가 있었다. 갓 시집온 새댁 눈에 시누가 어린아이처럼 보였을 테고 엄마처럼 나를 잘 돌봐주었다. 어렵게 살았지만 다들 정 많고 살가운 사람들이라 배고픈 설움도 잊고 살 수 있었다. 그렇게 유년시절은 아버지의 황망한 죽음, 그 이후의 가난과 어머니의 고생, 광복과 6.25로 이어지는 격동의 세월과 함께 했다. 가난했지만 형제들과 우애가 좋았고 어머니는 힘들고 지쳤지만 우리 앞에서 한숨 한번 내쉬지 않으셨다. 그렇게 강인하고 따뜻한 분이셨다. 어머니 일손을 도우며 나는 큰 애기가 되고 스물이 넘었다.

기별 없이 찾아온 혼담

대전에 나가있던 둘째 오빠가 어느 날

“어머니 애일이 선 볼 사람 있어요. 시집 보내야겠어요”하는 말에 화들짝 놀란 수줍은 큰 애기였다. 둘째 오빠와 같이 일하던 남편을 오빠는 손아래 매제 감으로 마음에 두고 있었다. 우리는 오빠와 어른들의 혼담이 오간 후 3년 만에 결혼을 했다. 남편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성실하고 듬직해보였지만 내가 마음에 들어 고른 사람도 아니고 어른들이 정혼한 사람이라 그 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스물두 살 그렇게 결혼이라는 운명과 만났다. 한 남자를 만나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새로운 인생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결혼 전에 남편을 한 번 밖에 못 만나고 결혼했지만 탈 없이 해로하며 잘살고 있다. 천생연분은 맞는 모양이다.

결혼 전 친구들과
결혼 전 친구들과

시아버지 시집살이, 연단의 날들

결혼은 다른 운명과 만나는 출발이다. 한 남자를 만나면서 시댁의 울타리에 들어간다. 결혼 후 바로 시어른을 모시고 살았다. 결혼 전에 어려운 살림이었어도 막내딸이라 귀여움 받으면서 힘든 일은 많이 하지 않았다. 그래서였던지 시어른을 모시는 일은 여간 신경 쓰이고 부담되는 일이 아니었다. 아버님은 보통 분이 아니라 식사며 일상을 챙겨드리는 일들이 갓 시집 온 새댁한테는 시어머니 시집살이가 아닌 시아버지 시집살이였다. 시아버지는 엄한 분이셨고 기개가 남다른 분이라 늘 어려웠다. 남편의 친어머니인 시어머님은 26살에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남편에게도 그리움 속의 어머니지만 나에게도 역시나 존재가 없는 시어머니였다. 갓 시집왔을 때 시어머니는 아버님의 여러 부인 중 한 분이셨다. 남편은 농담처럼 가끔 나에게 푸념했다.

“내가 당신까지 여자 손을 열 한 명이나 거치면서 살았어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말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 손에, 새어머니들 손에 숙모 손에, 그리고 아내인 나의 손을 거쳤다는 마음 아픈 사연이다. 시아버님은 평범하지 않으셔서 집안 보다는 당신의 성공에 더 큰 관심이 있으셨던 어른이다. 그 연세에도 젊은 시절 해외에 나가 사업을 하기도 하셨다.

1960년대에 대만에서 한약재 유통 관련 사업을 하셨던 앞서가는 분이셨다. 남자가 시대를 앞서가면 장부의 기개는 살지만, 식구들한테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안팎으로 조화롭게 이뤄간다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 과정에 돌아가신 시어머니도, 남편도 고독하고 힘겨운 시간들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안나와 레나도의 결혼

시어머니는 26세,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시아버님은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하고 그 마음을 달래느라 새어머니들을 만났지만 온화한 가정을 꾸려 나가시는 건 졸장부들의 24시간이라고 생각하신 거 같았다. 어린 새댁인 내가 비위를 맞추기엔 너무 어려운 분이었다. 남편은 아버님과 달리 소박한 삶의 가치를 더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새댁 때는 아침마다 아버님의 아침 밥상을 차리느라 진땀을 뺐다. 갓 담은 김치에 고기를 재워 먹음직스럽게 올렸다. 솜씨는 없지만 어르신 밥상이라 온갖 정성을 다하고 반찬이란 반찬은 다 꺼내 올렸다. 시험보는 아이처럼 아버님의 젓가락만 쳐다보고 있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아버님은 드시지 않았다. 그때서야 아버님이 입이 짧은 분임을 알았고 험난한 시집살이가 그려져 그날은 한숨만 나왔다.

다음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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