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드리나무로 깊이 뿌리 내리다(2)
아름드리나무로 깊이 뿌리 내리다(2)
  • 김경희 작가
  • 승인 2020.11.24 10: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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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연 (1932~)

"나 파독 광부출신이오."

근·현대사를 아우르는 어르신의 89년 인생 앞에서 가슴부터 뛰었다. 숙연해지는 마음은 그 다음이었다.

“회장님 점심 뭐 드셨어요?”

“불백으로 먹었어요”

불고기 백반을 불백 이라며 젊은 친구들의 언어를 쓰셨다. 89세의 어르신은 아직도 사회와 소통의 통로를 열어두고 계셨다. 감색양복에 아이보리색 넥타이로 감각도 놓치지 않으셨다. 손수 골라 매셨다는 영국신사 황장연 회장님.


내가 파독 광부로 떠나 있을 동안 아내는 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4살 5살 연년생 남매를 돌보고 있었다. 미안하고 너무 보고 싶어 편지에는 사랑한다는 말로 가득 채워졌다. 1주일을 견디는 힘은 아내와 주고받는 편지였다. 우리에게는 연서였다. 지하 천 미터 독일 갱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아내는 짐작할 수 없었다. 나조차도 그 힘겨운 싸움에서 매일 죽다살다를 반복했으니까. 우리들의 그 시절이 나라의 번영과 가족의 영달을 위한 시간이었다고 위로할 수밖에... 독일 탄광일은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주말에 구라파 여행 다녀온 이야기만 써서 편지를 보냈다. 파독 광부들도 숨통이 트여야 또 새로운 날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여행사가 주말이면 구라파 여행을 할 수 있는 상품을 들고 왔다. 나도 주말을 이용해서 구라파 여행을 다니고 현지에서 아내에게 엽서를 보내곤 했다. 생경한 현지의 풍경이 아내를 안심시키는데 한 몫을 했다. 3년 동안 아내와 주고받은 편지는 허리까지 쌓였지만 이제는 베를린에서 보낸 엽서 한 장만 남았다. 수없이 사랑한다고 목 놓아 썼던 편지들, 수많은 말들은 다 사라졌지만 베를린에서 보낸 엽서에 담긴 한 글자 한 글자는 아직도 남아 그 시절을 회고하고 있다

대명건재사
대명건재사, 현역 시절 33년간 운영

젊은 날의 초상, 대명건재

옥천 읍내에서 ‘대명건재’를 33년간 운영했다. 대명건재는 건설 회사가 아닌 자재만 넣는 회사였다. 옥천읍에 새로 시가지 정리하는 시기에 집을 새로 뜯고 지을 때 건설경기가 좋았다. 나는 손님을 왕으로 모신다는 철칙을 세워놓고 있었다. 좋은 목재를 꼭 공급했고 나보다 어린 손님에게도 깍듯이 인사로 대접했다. 영국신사 소리 듣던 시절이다. 현역에서 손을 놓은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대명건재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못 하나를 팔아도 정직해야 한다는 철칙을 두고두고 잊지 않았다. 대명건재할 때 아침 7시에 출근하고 서류 결제 한 다음에 돌람산 등산을 했다. 9년간 게으름 안 피우고 다녔는데 당뇨로부터 나를 지키는 훈련이기도 했다. 당뇨약 먹은 지 30년이 되었는데 아직 잘 관리하고 있다. 당뇨도 인생처럼 인내의 싸움이다.

1970년대 교육청 땅을 205평 사면서 대명건재는 시작되었다. 3015만원에 사서 8억을 받았다. 큰 수익을 낸 거 같지만 외상값 떼인 것이 4억 이었다. 장사를 처음해서 목재를 가져가면 돈을 다 주는 줄 알고 퍼줬더니 돌려받지 못한 것이 수두룩했다. 세상을 몰랐던 건지. 우리들이 사는 현장 자체가 인생의 시험대다. 대명건재가 현역의 마지막 일이었다. 아들딸 남매를 두었는데 아들은 미국에 살고 딸은 서울에 살고 있다. 미국에 다녀온 지 4년 이젠 코로나로 오가기도 어려워 화상 통화를 한다. 아이들이 보고 싶으나 어쩌겠나 화상 통화를 배워야지. 아내 먼저 가고 명절에는 서울 딸네 집으로 역귀성을 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 탓에 역귀성 열차에도 몸을 싣지 않았다. 오래 살다보니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일 이라는 말들을 실감하면서 살고 있다.

내 인생의 깊은 울림 신앙

53년 전 우리 집에서 전도사님을 모셔다가 예배를 시작했다. 서너 달 집에서 예배 보다가 92평짜리 텃밭에 교회를 올렸다. 41만원에 교회를 샀는데 본부에서 40만원을 보조해줬다. 교회에서 만원 보태서 예배당을 설립한 셈이다.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믿음의 안식처, ‘금강 침례교회’는 올해가 개척된 지 53년째다. 작은 나무가 숲을 이루듯이 우리의 믿음도 그렇게 성장하고 복음을 전하고 있다. 이제 소망이라면 사랑하는 애인 만나러 하늘나라 갈 때 1주일만 앓다가 잠자면서 출발하는 것이다.

아내는 30년 전 삼양국민학교 재직시절 병이 발생해서 고생하다 7년 전에 먼저 하늘나라로 떠났다. 고생 많이 한 아내에게 아직도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남아있다. 아내 퇴직 후에 같이 여행 다니며 아내의 노고를 위로했지만 마음 빚을 절반도 갚지 못했다. 코로나로 전처럼 매일 6.25 참전 용사 사무실에도 나가지 않다보니 자연스레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90을 목전에 둔 나이든 남자 혼자 산다는 건 많은 불편함을 떠안고 사는 건데 이제 익숙해져서 하루하루 무탈하게 보내고 있다. 혼자 남아 하루는 자유롭고 하루는 고독하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고 공부 잘하고 자기 존재감이 높던 자녀들은 미국으로 서울로 떠나 고향집을 나이든 내가 홀로 지키고 있다. 인생이 혼자 왔다가 혼자 돌아가는 것은 누구에게도 예외일수 없다. 오늘 하루 나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24시간을 보내냐의 문제이다.

아내 퇴직후 여행
아내 퇴직후 여행

다 지나간다.

집에서 보내는 하루도 꽉 찼다. 신문만 천천히 넘겨가며 읽어도 하루를 다 써야 한다. 책도 보고 뉴스까지 챙겨보면 하루가 금방 간다. 낮잠 잘 시간도 없다. 할 일없이 뒹굴면 오히려 시간이 더디 가고 무료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혼자 있으려니 외로움과 만나는 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가끔 우스갯소리로 집에 들어가면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도 싸울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얘기하곤 한다. 그만큼 고독이라는 병이 무섭다. 7년 전 먼저 간 아내 생각에 부엌에 들어가면 아직도 아내 향기에 눈물이 흐른다. 주방 일도 나에게는 일과 중 다소 짐스런 부분이긴 하다. 물론 반찬은 노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여사들이 챙겨주고 있다. 집에서 된장찌개라도 끓여먹으려면 식탁을 준비하는 것은 익숙하지만 문득 문득 아내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들 곤 하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혼자 있는 이 집이 적막강산 같지만 집안 구석구석 아내의 향기가 배어있어 적적한 마음을 달래준다. 떠나고도 남는 것이 사람의 향기인가 보다. 그래서 인향만리라고 했던가. 사랑하는 아내 곁으로 가는 그날까지 고고한 아름드리나무로 흔들릴지언정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뿌리 깊은 나무로 버텨 젊었던 그날, 27살의 신랑 황장연으로 다시 아내와 연정을 나누어보리라.

덧없어 보여도 지난 세월 속에서 사랑하며 행복에 젖고 슬픔에도 잠겨보았다.

수많은 희로애락의 감정들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왔다.

중국의 노학자 지센인의 수상록 <다 지나간다>의 글귀를 되새겨본다.

아흔이 되니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들의 입장 이었을 때

그들보다 더 선하게 행동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해 타자에 대해 나에 대해 관대해지며 지금까지 왔다.

결국,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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