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드리나무로 깊이 뿌리 내리다(1)
아름드리나무로 깊이 뿌리 내리다(1)
  • 김경희 작가
  • 승인 2020.11.12 18: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황장연 어르신
황장연 어르신

황장연 (1932~)

"나 파독 광부출신이오."

근·현대사를 아우르는 어르신의 89년 인생 앞에서 가슴부터 뛰었다. 숙연해지는 마음은 그 다음이었다.

“회장님 점심 뭐 드셨어요?”

“불백으로 먹었어요”

불고기 백반을 불백 이라며 젊은 친구들의 언어를 쓰셨다. 89세의 어르신은 아직도 사회와 소통의 통로를 열어두고 계셨다. 감색양복에 아이보리색 넥타이로 감각도 놓치지 않으셨다. 손수 골라 매셨다는 영국신사 황장연 회장님.


열여덟 살, 6. 25에 참전하다.

아흔을 목전에 두었다. 1932년생 89세. 내 고향은 옥천 수북리다. 태어난 그 집에서 사뭇 살고 있다. 내 고향 수북리는 낚시꾼이 끊이지 않았다. 중학교 다니기 전까지 나도 대나무 가지로 물고기 낚시를 했다. 손맛이 맵지 않아도 물 반 고기반이라 어설픈 손놀림에도 고기들이 몰려 들었다. 시골살이 하는 사내 녀석에게는 손에 꼽을만한 락(樂)이었다.

나는 8남매 중 일곱 번째로 태어나 귀여움 많이 받았다. 큰 형님 외에 줄줄이 누님 5명 밑에 아들로 태어나서 금이야 옥이야 사랑받았다. 까마득한 기억 속에는 누님 등에 업힌 여섯 살 무렵의 내가 희미하게 보인다. 동이면 감은골에 사립학교가 있었다. 학교를 못 다니는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인데 유치원생 자격으로 나도 누님이랑 같이 또랑을 5번이나 건너 그 학교를 다녔다. 냇가를 건너는 다리도 없어서 순례 누님 등에 업혀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누님의 등은 솜이불에 얼굴 묻은 듯 보드랍고 향기로웠다. 어머니 등은 단단한 거북껍질 같았다. 매일 종종 걸음으로 집안을 건사하시느라 무딘 근육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가갸거겨 국문 배우는 재미에 빠질 무렵 죽향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다.

6.25 나던 해 고교 2학년이었다. 위급할 때라 청년들을 무조건 끌고 가는 시국 탓에 동네 형님을 따라서 부산으로 피난 갔다. 부산에 가 있는 동안 군대 가면 살아오기 힘들 것 같아서 경찰에 자원입대했다. 그 때가 열여덟 살이었다. 경찰로 복무한 기록이 6.25 참전 용사로 인정받게 되어 참전 용사회 회장도 맡게 됐다.

대학교는 홍익대 영문과에 진학했는데 대전 성남동에 전시대학을 운영 중이었다. 홍익대 2학년 다니다가 가두모병(길거리 모병)으로 끌려갔다.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마치고 헌병학교로 갔다. 팔공산 경비 수색대로 서울이 복귀되면서 북한산에서 한동안 있다가 강원도 화천 등을 다니면서 잔류병 소탕 작전에 투입되었다. 앳된 얼굴이 그대로 인 채 전장(戰場)을 누비고 있었다. 시절을 탓할 수밖에.

5년 동안 50개월 만기제대를 했다. 일등병으로 강등되는 군복무 비화도 갖고 있는데 후임병 괴롭히는 선임하사를 혼내주고 1주일간 영창을 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너털웃음 나오지만 불의와 타협 못했던 피 끓는 시절이었다.

만기 제대날짜 5개월 전에 휴가 나와서 12월 5일 날 결혼하고 집에 있는데 군에서 편지가 왔다. 결혼했으니 오지 말라고 집으로 제대증을 보낸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부대에서 신임 받았던 만큼 보상받았다. 결혼하고 5개월 후에 제대증이 왔다. 제대 후에 집 농사 돕고 소 풀 뜯어주면서 평범한 시골 청년의 24시간을 살고 있었다.

결혼식날 부모님과 함께
결혼식날 부모님과 함께

27살에 국민학교 교사인 아내 육병완과 결혼했다. 당시는 노총각소리 들을 나이였고 정혼자리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우리 어머니가 건강이 안 좋으셔서 머슴 들이느니 며느리 얻는다고 했는데 그만큼 우리 집에 시집오면 고생한다는 얘기였다. 부잣집은 아니어도 때 꺼리는 있었다. 부모님은 벼농사 보리농사를 지었다. 그 때는 조반석수 (아침밥 먹고 점심 굶고 저녁은 죽)만 해도 먹고 살만하다고 했는데 우리 집도 조반석수 정도는 너끈히 하는 집이었다. 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살림살이 맡기려고 했는데 내가 장가를 안가 한 걱정이셨다. 그래서 아내는 우리 집에 더더욱 귀한 사람이었다.

독일 함보른 탄광 천 미터 갱 속에 꿈 청춘 사랑을 묻다.

제대 후에 농사짓다가 부산에서 철공업을 잠시 하고 다시 청성면에서 탄광을 했다. 구음리 소구르미에서 탄광 하다가 독일광부로 3년간 다녀왔다. 1963년 32살 때 파독 광부 모집공고가 나서 매형이 추천을 했다. 광부 5천명 간호사 2천명이 차관을 빌리러 목숨을 걸고 결행된 독일행이었다. 굴곡진 역사의 현장에 나도 서 있었다. 당시 서독 광부의 임금은 국내의 8배였는데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79달러였다. 1차 광부 500명 모집에 3천명 가량 모여들어 6:1의 경쟁률을 보이기도 했다. 한국 경제에 종자돈 역할을 했다. 독일에 간 분들은 저마다 사연이 있었지만 결국 돈버는 목적은 같았다. 나는 탄광을 하던 중에 가게 되서 채탄 기술을 배우러 가는 목적이 더 컸고 생각보다 결과가 나오지 않던 탄광 일에 돌파구를 마련하고 싶은 마음에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독일에서의 급여는 학교 교사이던 집사람 월급의 3배 정도를 벌었다. 옥천에서 서대리 사람 한명과 우리 둘이 파독 광부명단에 올랐다. 낯선 땅 독일, 외로운 시골, 끝도 없는 갱 속에서 석탄을 캤다.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이 오셔서 눈물 흘리며 광부들과 간호사들을 격려했는데, 없는 자의 설움을 타국 땅에서 배웠다. 중노동하면서 인생관이 달라졌다. 지하 천 미터 갱 속에서 피땀 흘리고 석탄 캐면서 치열하게 사는 현장에 들어가 보니, 인생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 다시 한 번 의지를 불태우고 주먹을 불끈 쥐게 됐다.

1963년 파독광부 1기생들
1963년 파독광부 1기생들

“지하 천 미터는 얼마나 뜨거웠나 몰라. 족히 50도는 됐지. 선풍기가 돌아가도 헛일이야.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지는데 땀을 닦을 수도 없이 8시간씩 일했어. 한국 사람들은 돈을 더 벌려고 10시간 15시간 일했지. 목숨 걸고 돈 벌려고 온 사람들이 많았지. 인생의 승부수를 걸고 온 사람들이야. 평일에는 지쳐 쓰러지고 토요일, 일요일 편지를 썼어. 아내와 편지로 만리장성을 수도 없이 쌓았어. 내 편지 사연은 주로 주말에 구라파 여행을 다녀온 이야기였는데 여행지마다 카드에 써서 붙였어. 사실 숨이 막힐 만큼 힘들었지만 아내한테는 잘 있다고 써서 보냈지. 그 꿀맛 같은 편지에 힘들다고 말하면 아내 마음이 편할까? 편지 기다리는 맛에 1주일을 거뜬하게 보냈는데 말이야. 아내는 4살, 5살 우리 아이들 쑥쑥 자라는 얘기를 써 보냈어. 사랑한다는 사연도 빼먹지 않았지. 우리 기수가 300명 갔어. 전국에서 다 모이는 거야. 강원도 함백 탄광가서 실습을 했어. 광부 경력자를 모집했지만 탄광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고, 독일 현장에 가면 천 미터 넘는 지하 갱도에 들어가서 작업하게 돼서 사전에 훈련을 받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어. 그래서 함백 탄광에서 실습하면서 훈련을 받았지. 목숨 걸고 타국에서 일한 인연들인데 시절 인연이라 다들 잘 살았으리라 믿고 있어. 살아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고양시민과 함께하는 고양일보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31-908-2255 / 010-9907-2289

고양일보 후원하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