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남 목사/우림복지법인 대표
조규남 목사/우림복지법인 대표

연극에서 어릿광대는 막간을 이용하여 남을 웃기는 역할을 맡는다. 서양 뿐 아니라 우리나라도 동네 서커스나 유랑 극단의 연극 무대가 열리면 막간에 코미디언들이 나와 만담 등으로 관중들을 웃기며 서커스에서의 위험한 곡예나 연극으로 인한 긴장감을 풀어주어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그것이 현대에 와서 코미디언 그리고 개그맨(우먼)으로 명칭이 바뀌어 웃음을 찾고자 하는 현대인들의 안식처와 같은 역할을 하며 무대의 중심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웃어야 복이 오기 때문이다.

삶에 지치고 고달픈 현대인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개그맨들은 팍팍한 현대인들의 삶에 윤활유나 청량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애환은 있다. 남을 웃긴다는 일처럼 어려운 일은 없고, 때로 남을 웃기기 위해서는 자신이 망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똑똑한 사람을 보고 찬사는 던질지언정 웃지는 않는다. 웃기는 존재는 나보다 훨씬 못난 바보이고, 그 바보의 바보 짓때문에 웃으면서 우월의식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희극 왕인 찰리 채프린의 명언이 있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코메디이다." "다른 사람의 웃음으로 인해 내가 고통받는 것은 괜찮다. 그러나 나의 웃음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고통받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섬찟할 정도로 무서운 말이다. 이 웃음의 철학을 깨닫고 알려주기까지 그는 얼마나 고통받고 속으로 울어야 했을까.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희극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어느 개그우먼이 죽었다. 스스로 세상을 하직했다. 연예인들의 자살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듣지만 이 경우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녀가 남을 웃기는 직업의 개그우먼이라는 데 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남을 웃기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슬픔을 주며 웃기는 게 아니라 울리고 있다. 대부분 요절했던 비운의 가수들은 사람의 감정을 슬프게 몰아가는 노래들을 불렀고 또 자신의 삶도 자신들이 부른 노래처럼 음울했고 어두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가수의 그 노래'란 말로 그 삶을 평했다.

그런데 이 경우는 정반대이다. 그녀가 남을 웃기니까 그녀도 웃음의 밝은 삶을 사는 줄 알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가끔 연예인 프로에서 남을 웃기기 위해 망가지는 개그맨들을 본다. 재미있다고 깔깔대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 참 힘든 삶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살이 너무 쪄서 다이어트 해야 할 사람들이 프로에 나와 경쟁하듯 먹방 대결을 하다니... 웃으라고 하는 일일 것이다. 시청자들이 웃어 줄 수만 있다면 자신이 고통받는 것은 괜찮다는 듯 보여진다.

그녀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것은 무엇일까? 단순히 외형적인 요인만은 아닐 것이다. 뭔가 되돌아가고 싶은 변곡점에서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그 무엇이 그녀를 어둠 속으로 끌고 갔을 것이다. 이미 자신 안에 웃음을 잃어버렸기에 이제 더 이상 남을 웃길만한 힘도 소진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웃어야 할, 웃겨야 할 의미를 상실해버린 것이다. 남을 웃겨야 하는 개그우먼이 남을 웃기기는 커녕 자신 안의 웃음꽃도 싹이 말랐다면 그 끝은 자기부정의 길일뿐이다.

갑자기 구원자요 해방자 예수의 모습을 떠올렸다. 적어도 성경에 묘사된 예수의 모습은 남을 웃길만한 요소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바리새인들 같은 위선자들을 향한 분노의 모습 말고는 따르는 무리들을 향해 항상 담담한 표정으로 그냥 빙그레 웃으며 지그시 바라보는 고요하고 따스한 눈빛이 생각되어질 뿐이다. 딱히 말하라면 예수에게 고뇌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고 생각된다. 고뇌의 얼굴 표정, 그게 내겐 예수의 자화상이다. 검토되지 않은 삶은 가치 없는 삶이라고 단정한 소크라테스의 명제를 되뇌어본다. 그리고 십자가 죽음을 앞에 두고 기도하는 예수의 고뇌에 의해 내 삶의 가치를 검토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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