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시절
교사시절

송영자 (1940~)

지도는 영토를 뜻하는 게 아니다. 각자 자신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곳이다. 세상살이에서 단순하고 쉬운 것은 하나도 없다. 인간관계도 그렇고 드러나는 결과를 단 하나의 이유로 단순하게 설명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결과가 나의 잘못이라거나 다른 탓으로 돌리기에는 단 한 줄로 정의할 수 없는 게 인생살이라면 나의 인생 마침표는 사랑과 감사이다.


세 번째 행운-교련교사 전행고시

나는 순수한 소녀시절도 아름다운 처녀시절도 그냥 관통하고 말았지. 인간으로 태어나 특히 여성으로 성장하면서, 출산을 통해 인간존재를 인식할 때 그래도 나는 슬펐네. 나는 아름다운 영혼을 지녔고 지나치게 총명하였고 공부를 위해 전투적이었다. 한결같이 벌이는 사업마다 실패하는 남편이지만 나를 사랑했고 받지 못한 엄마의 사랑을 내게 주었기에 나의 엄마이고 아버지라네. 감사할 뿐이라오.

서울에 올라가서 셋째를 해산했을 때 친구 지영이 전공 과목만 보는 교련교사 전행고시가 곧 있을 예정이라고 전화를 했다. 지영이는 그보다 먼저 나에게 귀인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소록도로 수학여행을 간단다. 수학 여행비가 6천원이었는데 당시 쌀 서너 가마니 값이었다. 월 1천원의 수업료도 제 때 내지 못해 밀려있는 내 형편에 수학여행이란 말은 집에서 불문률이었다. 그런데 수학 여행비를 완납한 학생들의 명단에 내 이름이 올라 있었다. 서랍을 열어보니 지영이의 메모가 들어 있었다.

“영자야 걱정하지 말고 수학여행 때 즐겁게 지내고 좋은 추억을 쌓겠다는 마음 준비나 잘 하렴” 가지런히 적힌 메모를 읽고 나는 한없이 눈물만 흘렀다. 고맙고 염치가 없었지만 수학 여행비에 간식비, 수학여행 중에 가장 중요한 사진사의 촬영 비용 등을 모두 지영이가 내 주었고, 나는 몸만 다녀왔다. 수학여행 내내 소록도의 잔잔한 풍경보다 지영이가 보여준 아름다운 하늘에 넋을 잃고 있었다. 지영이 손을 꼭 잡고 누워 밤하늘의 별들을 세던 그 밤을 어찌 잊을까. 평생의 은인 고마운 친구, 지영아.

나는 마법에 걸린 것처럼 해산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서류준비부터 했지만 이미 접수가 끝났다. 나는 퉁퉁 부은 몸을 가지고 구비 서류도 갖추지 않은 채 교육위원회로 달려가서 아침부터 과장 책상 옆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 제발 시험만 보게 해달라고 읍소하였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세 아들의 어미에다 가장 노릇하는 아내였기에... 오후 네시쯤 당황한 과장이 임시접수를 받으며 내일 오전 10시까지 구비서류를 제출하지 않으면 자격상실이라고 엄중히 말하였다. 남편과 택시를 타고 서울지방병무청으로 가서 예편한 간호장교들의 병적필름에서 나의 병적기록을 확인 후 병적 확인서를 기적같이 발급받아 제출하고 시험을 무사히 치르고 마침내 교련교사 2급자격증을 받았다. 내 인생은 길목마다 외줄타기의 연속이었다.

교사, 눈부신 날들

나는 즐겁고 신나게 학교에서 근무했다. 아침 제일 먼저 출근해서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 전등을 환하게 켤 때 전율이 올 정도로 행복했다. 커피도 열심히 타주었고 퇴근할 때 교무실 불을 끄고 나왔다. 무학여고 시절 100여 명의 남녀교사가 근무했는데 내가 새 옷이라도 입고 가는 날이면 하이힐을 신고 패션쇼도 불사했다. 무학여고에서 담임을 맡은 반 조은경이 살포시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책상 위에 무언가를 놓고 달려 나간다. 편지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봉투를 열어보니 볼펜을 꾹꾹 눌러 예쁜 글씨체로 내게 감사의 편지를 쓴 것이다. 다른 반 아이들이 내가 우리 반 아이들 모두에게 봉숭아 물들이기 이벤트한 것을 부러워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아이가 바라본 나는 어떤 모습일까? 자신은 집에 가서 내 자랑을 많이 한다고 한다. 내가 자주 하던 말인 “나한테 지식을 배울 생각을 하지 말고 내 생활 자세를 배워요. 내 생활 자세는 남에게 가르칠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것 때문에 이 자리에 자신 있게 설 수 있는 거에요”라고 말한 것이 자주 떠오른다고 했다. 내가 아이들 자율학습 시간에 감독한다고 멍하니 있지 않고 아이들 사물함을 열심히 닦았는데 그토록 열심히 닦는 선생님은 처음 보았다고 하였다. 내 정성 덕분에 반 아이들이 밝고 명랑하게 자란다고 감사해 하는 편지를 보면서 나는 그저 행복하였다.

송씨네 묘지 합택 프로젝트

아버지와 나의 친엄마가 어린 나이에 만나 나와 민식이를 보았고, 친엄마가 병으로 돌아 가시자 아버지는 둘째 엄마와 재혼해서 세 명의 자식을 두셨다. 정치가의 길로 들어 가면서 다시 첩 엄마와 나름 불꽃같은 사랑을 하며 두 아들을 더 두었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누구까지 내 형제자매로 심리적인 연대감을 가질 수 있을까? 둘째 엄마가 폐병으로 내가 근무하던 도립병원 병실에서 내 손을 잡고 쓸쓸하게 운명을 달리할 때 나는 알았다. 이복동생 셋이 나의 형제자매임을. 내가 맏이이니 그들을 품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언제나 혼자였고, 나의 운명은 내가 개척해 나갔다. 비정한 아버지는 첩 엄마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이 더 가까우실지 모르겠다. 너무 젊은 나이에 나를 보셨기에 나는 어찌 대해야 할지 모르는 부담스러운 존재였을 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 속에는 항상 내가 집안 맏이로서 집안 돌아가는 형세를 신경 쓰고 제사라도 제대로 챙겨야 하는 의무감이 뿌리 깊이 박혀있다.

친정 쪽에 금초할 사람이 없어서 거의 5년 동안이나 연평리는 친척 완수 오라버니에게, 개한들은 몽골이에게 금초 수고비를 통장에 입금시키고 부탁을 해서 추석 지내고 확인 겸 성묘를 했다. 그런데 그 비용이 매년 30만원 이상 들어갔으며 연평리로 갔다가 이어서 개한들로 다니기도 어려웠고 내가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을 때, 조상님들을 한 자리에 모시기로 결심했다.

마침 장계초등학교 동창인 임필택이 장례 일을 한다길래 연락하여 2008년 11월 23일로 날을 잡았다. 전주 천주교묘지에 매장 되어있던 아버지와 첩 엄마는 외순네 더러 파묘해서 모셔오라고 하고, 나는 아침 7시에 개한들에 도착해서 어머니와 할머니와 증조할머니를 파묘해서 모셨다. 또, 연평리로 가서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를 파묘하여 동생 민식이 자리에 차례대로 평장하였다. 위로부터 증조할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첩 엄마, 먼저 간 동생 민식이를 순서대로 평장하고 잔디 떼를 충분히 얹은 후에, 마지막 제를 올리고 표석도 세웠다.

표석 전면에는 연안 송씨 22대 영선(5대 국회의원) 가족묘지라고 새기고 뒷면에는 증조부부터 차례대로 매장된 분들의 이름을 새기고, 한쪽 구석에는 옥향나무 한 그루를 기념 식수하였다. 경례 고모는 남자도 못해 낼 큰일을 하였다고 칭찬하며 100만원을 내놓았다. 이렇게 큰일은 사실 남편이 다 진행한 것이다. 내가 장녀라는 책임감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남편이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고, 조상을 위한 것으로 이를 계기로 서로 마음을 합치고 물질도 같이 부담하면서 서로 우애가 돈독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서두르지 않았으면 공사를 진행할 사람도 없을뿐더러 금초도 못하고 벌써 묵묘(黙墓)가 되었을 것이다.

팔순 기념 가족사진
팔순 기념 가족사진

인생은 아름다워라

이제 81세. 그래. 나는 지금 휴가 중이며 여행 중이지. 이제 그만 빡세게 살아도 되는 거지. 남편과 연애하며 사는 거잖아. 희망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평화로 하루를 마감하며 박영대 병장의 품에서 잠이 들지. 창밖에는 폭우이거나 눈이 휘몰아쳐도 그대 든든한 품은 그윽한 봄 향기가 가득하다. 나이 들어서 청소하느라 뼈가 녹아나지 않도록 청산집은 둘이 살기에 충분한 공간으로 소박하게 지었다.

온갖 상념이 다 지나간다. 지금은 괜찮다. 이제 먼 길을 지나 여기까지 왔는데, 얼굴의 주름은 나뭇잎의 잎맥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위로하며 늙은 내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남편의 진실을 마주 하나니... 하늘의 별들은 언제나 반짝이고 있었는데, 잠시 구름에 가리거나 폭풍우 때문에 볼 수가 없었을 따름이다. 박영대 병장 당신은 삶의 여행자로서 지친 나의 육신을 기대고 잠시 쉬는 것도 괜찮다고 기꺼이 그대의 어깨를 내주었지. 말은 안했지만 내게는 당신의 부드러운 사랑이 과분하였고 어찌 적절하게 표현할 수 없는 그대의 깊이를 그저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 두었었지요. 분명 그대의 사랑은 세상의 값어치인 돈으로 살 수 없는 절대적 진리 같았다고 감히 고백하리다.

창문을 통해 바라보이는 산과 들은 과하지 않으며, 꽃과 나무는 정갈하게 가꾸어 놓았다. 나무 위로 새소리 바람 소리가 쉬었다 가고, 높은 하늘에는 구름과 별과 달이 평화롭게 이동한다. 남편은 어느 날 내게 고백하였다. 창밖은 찬란하게 봄이 아우성을 치던 날이었는데, 무심하게 “내가 왜 무능하게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다시 태어나면 벽돌공이 되어서라도 밥벌이를 해서 당신을 먹여 살리겠노라고...”

나는 대답 대신 눈을 돌려 창밖에서 후드득 떨어지는 매화꽃을 바라보았지.

나의 남편이 내게 해주었던 언어들이 바로 꽃의 말이라고 나는 고백한다.

내게는 그대 박영대 병장, 나의 존재의 이유이자 완성입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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