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남 목사/우림복지법인 대표
조규남 목사/우림복지법인 대표

[고양일보] 오랜 친구와 SNS로 대화하다가 교회와 목사와 이른바 윗 자리를 차지하고 입만 살아서 말만 번지르게 잘 하는 부류의 사람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입질에 대해 나 역시 수긍은 하면서도 안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짜증과 역겨움으로 반격을 늦추지 않고 쏘아부쳤다. 오랜 친구이기에 가능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 네 말대로 실천 없이 말로만 떠드는 것 역시 문제다. 그러나 누가 그리 완벽하여 삶의 완성을 이룬 후에야 입을 열어 말하겠나? 세상에 의인이 어디 있단말고? 모두 죄인이고 죄인끼리 모여 사는 세상이지만, 그나마 그 속에서도 잘 살아보려는 '과정'의 노력으로 척이라도 하다보면 그러다 하늘의 은덕으로 구사일생할지 누가 알겠나?

내가 요즘 지겨워하는 것이 '개혁 논리'이다. 도대체 이야말로 요즘 입만 열면 세상이 변화해야 하고 교회가 바뀌어야 한다고 떠드니, 어떤 때는 밑도 끝도 없이 지 자신들도 모르는 변화와 개혁을 외치는 놈들이 더 짜증나고 더 시끄럽게 생각된다. 그리고 세상에서야 그렇다치지만, 교회 안에서 의식있음을 드러내며 교회개혁, 목사변화를 게거품을 물고 외치는 녀석들이 더 꼴보기 싫은 것이다. 그럴 때마다 너의 말처럼 꼭 그렇게 한다.

So what? 그래서 어쩌라고?! 누가 교회 썩은 것을 몰라? 누가 개혁해야 하는지 몰라? 그런데 그게 내 뜻대로, 내 맘대로 안 되니까 나도 아파하며 고민하고 그러는 것 아니냐말야?! 더 심각한 것은 현실에서 그 해결책이 안 보인다 이거지. 그런데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문제를 넌 또 왜 꺼집어내어 떠드는 거야? 문제 분석은 그만하고 해결책 대안을 말해보라 이거다. 누군 너처럼 의식있는 체 할 줄 몰라서 이래? 난 이렇게 내 나름의 방법으로 노력해보고 있으니, 너도 outsider가 아니라 삶의 현장 안에 들어와 함께 부대끼면서 길을 찾아보자 이거야!

그러나 솔직히 이미 답은 나와 있다. 인간 역사가 종결될 때까지 인간은 결코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다만 우리가 노력하는 그만큼 앞에 와 있을 뿐이니까. 그러니 이제 그마해라. 그동안 한국 교회 욕 마니 무거따~ 자랑거리보다 욕지거리가 많았던 한국 교회. 그러나 어쩌겠어? 교회는 주님의 신부이며 그리스도의 몸이고 우린 모두 그 지체인 걸. 그러니 고우나 미우나 보듬고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며 품고 가야지. 누가 뭐라 해도 그래도 내겐 교회만이 희망인 걸.

Being on the way! 어차피 우린 길 위의 존재로 삶의 완성이 아니라 삶의 한 과정(process)에 있을 뿐이니까. 그런데 그 이상 뭘 바라겠다는 거야? Now & Here! 지금 여기서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말이야!"

내가 그의 교회 비난에 악다구니를 쓰며 거센 항의의 반격을 가하자 그가 오랜 친구이면서도 목사인 나를 깜짝 놀라며 너무 뜻밖이라는 듯 서둘러 대화의 꼬리를 내렸다. 왜 그랬을까? 이렇게까지 나를 요동치게 한 숨겨진 분노는 무엇이었을까?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엉겹결에 반격을 당해 얼떨떨해 있을 친구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그동안 내 안에 쌓여왔던 불만이 친구에게 역공격을 가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아마 오랜 친구이기에 나의 부족함이 있을지라도 따뜻하게 감싸주기를 바라고 있던 마음의 거울이 깨어져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요즘 나를 매우 화나게 하는 것은 죄인들보다 죄인을 손가락질하는 수많은 의인이다. 특히 겸손을 위장한 영적 교만이다. 그들은 한국 교회의 많은 문제점을 낱낱이 열거하며 이 죄(문제점)들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고 처절한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는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나는 이 대목이 너무 힘든다. 이처럼 우리 자신의 문제점을 속속들이 분석하여 밝히고 이 죄목 앞에서 철저히 통회자복하는 그 모습 앞에 나는 더욱 초라한 죄인이 되어 위축돼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난 왜 그와 같은 영적 분별력과 통찰력이 없을까? 그에 비해 나의 영성은 왜 이렇게 무디어 있을까?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영적 무력증에 빠져 있는 내가 이 상황을 벗어나려 길을 찾아보지만 길이 안 보인다. 그들이 제시한 나의 죄는 너무 거국적이고 너무 방대하여 나는 열방을 품고 기도해야함에도 저 변두리 변방 구석의 외진 병상, 그 죽음의 공포 앞에서 홀로 고통과 씨름하고 있는 촌노를 떠올리고 내 기도의 부족으로 그 할머니의 죽어감을 어쩌지 못한 채 방치하는 듯한 또 다른 죄책감에 시달리며 더욱 작아지는 자신을 본다.

솔직히 나는 나의 죄성과 나의 연약함이 얼마나 초라한지를 안다. 그리고 이로부터 벗어나기 원한다. 한국 교회의 모든 문제를 내 책임으로 돌리고 이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여 내 마음의 면죄부를 받게 하기에 나는 이미 이마저도 매너리즘의 형식주의에 빠져 신선감을 잃어버렸다. 그보다는 나의 문제에 빠지기보다 이로부터 소망의 항구를 향하여 자유의 돛을 올릴 수 있도록 용기와 힘을 주는 선장의 격려사를 듣기 원한다.

나를 지치게 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다. 내 힘으로 어쩌지도 못하고 죄를 죄로 인식치도 못한 채 그저 열심을 내어 앞만 보고 달려왔던 내게 지금까지의 내 모든 길에서의 과정이 잘못되었으니 철저히 회개하고 완전 다 바꾸어야 한다는 질책 앞에서 나는 더욱 힘이 빠진다. 뭔가 바꾸라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바꾸어야 할지 그리고 그것을 새롭게 바꾸어야 하는데 감당해야 할 몫을 도저히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런들 지금 와서 어쩌겠나? 이제 그만 지겨운 책임론은 종결하고 싶다. 이젠 조심하며 감사로 나아가야 할 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길을 가다보면 맑은 날도, 흐리고 비오는 날도 그리고 맑은 날에 비오는 날도 있다. 맑은 날은 휘파람을 불며 춤추듯 걷고, 비가 오면 우산을 꺼내 들고 머리 위에서 빙빙 돌려라. 뺨에 닿는 빗방울 감촉이 시원하다 싶으면 우산도 접고 신발도 벗어버린 채 발바닥의 촉감을 느끼며 자유로운 영혼으로 눈앞에 쭉 뻗어진 아스팔트 위를 걸어라. 뭐 그리 두려울 것 없다. 좀 부족한 듯해도 하나님의 뜻을 믿고 따르는 자를 하나님은 죄인으로 몰아가지 않으신다. 그보다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나와 함께 비를 맞으며 비에 젖은 내 어깨를 감싸주실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인생 길의 한 과정일 뿐이니까. 자~ 보라. 이제 비도 그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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