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작은 거인, 김영숙 어르신.

가을날이면 코스모스와 키대기 하던 조그만 여자아이와 여든의 어르신은 한결 같았다.

소용돌이치던 인생의 파도를 넘어 잠잠한 항구에 순항의 닻을 내리셨다.


솥에 삶을 것들

그랬다. 우리는 솥에 삶을 것들이었다. 아버지한테는 줄줄이 다섯인 딸들이 눈에 가시여서 입버릇처럼 우리를 솥에 삶을 것들이라며 분노하셨다.

친정아버지는 한량 같은 분이었다. 술 좋아하시고 큰돈을 벌어 인정받고 싶어 하셨다. 병아리 부화장, 인조 직조공장에 손을 대셨다. 끊임없이 사업을 펼치며 실패를 거듭하자 아버지는 초조해지기 시작했고 어머니는 애써 참고 참다 아버지께 한마디씩 건네는 말씀은

“여보 쌀이 없어요.”

아버지는 두말도 안하셨다. 바로

“굶으면 되지”

아, 이런. 어머니의 애원 섞인 하소연은 공허한 메아리였다.

1950년대 후반은 온통 벌거숭이 산이었다. 땔감으로 다들 벌목을 해가서 깊은 산속까지 들어가야 제법 나무를 해올 수 있었다. 열 살 계집아이가 등에 나무를 짊어지고 내려오는 길은 왜 그리 멀고 험한지 눈물을 머금고 다니던 산길이었다. 열 살 남짓 나이에 세상을 알아버렸다.

방앗간 집 조수, 김씨네 셋째 딸

열여섯, 아버지의 조수가 되어 방앗간 일을 돕게 되었다. 발통기를 들고 집집마다 다니며 벼를 찧어주고 삯을 받아왔다. 조그만 여자애가 발통기를 돌리는 모습에 사람들은 다들 신기한 듯이 힐끔힐끔 쳐다보았고 측은하다며 혀를 끌끌 차는 소리에 쥐구멍을 찾고 싶을 때도 있었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멈추자 부끄러움도 사치이며 남들의 시선은 다 거추장스러웠다. 발통기 방앗간으로는 돈 벌이가 시원찮았던 모양이었는지 아버지는 다시 광산으로 눈을 돌려 금광을 했다. 아마 아버지는 그간의 실패를 금맥을 잡아 한 번에 만회하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살림은 갈수록 더 기울고 그 놈의 금맥은 어디에 있는지...혹시 허영심 잔뜩 든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신기루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오죽 마음이 급했던지

“이모네 소라도 끌고 와라”

어머니를 몰아붙였다.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 욕심이 당신과 가족을 더 큰 고통으로 밀어 넣었다.

아, 내몰린 결혼. 운명의 길모퉁이

아버지의 연이은 사업실패로 가세가 기울자 입하나라도 덜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큰아버지가 연통을 넣어

“영숙이 시집가야겠다. 정월 보름날 우리 집으로 오너라”

시집이라니.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말인지. 뭐가 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그 날짜에 큰아버지 집으로 갔고 머리를 빡빡 깎은 낯선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삼 삼장에서 일하는 그 남자는 햇볕에 그을린 얼굴이라 까무잡잡했지만 키 크고 잘생긴 남자였다.

“공주에 다녀옵시다.”

그는 무뚝뚝한 말을 건네며 나를 데리고 공주로 갔다. 애써 올린 입 꼬리가 어색한 사진과 금맥기한 시계하나로 약혼을 대신했다. 스물셋, 정월 보름에 만나 3월22일 결혼을 했다. 그 남자는 60년 가까이 함께 하는 남편 박승진 장로이다.

결혼식 날은 청승맞게 비까지 내려 내 속을 후벼 파고 말았다. 내 손을 꽉 잡아 주시던 어머니, 눈물을 참느라 꽉 깨문 입술에 붉은 연지는 지워졌다. 내 고운 스물세 살처럼. 어머니의 붉게 충혈 된 눈동자에 서글픈 새색시가 들어앉아 있었다. 때 맞춰 내리는 비를 피하느라 초례상(醮禮床)은 허름한 창고에 차려졌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결혼식, 결혼사진 한 장 없이 시댁으로 떠났다. 입하나 덜겠다고 시집갔더니 시댁은 더 기가 막혔다. 마룻바닥은 발 디딜 때마다 삐거덕 거리고 처마가 머리끝에 닿는 곤궁하기 짝이 없는 집이었다. 한숨부터 나왔다.

결혼 또 다른 인내의 시작

벼랑 끝에 나를 세웠더니 인생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은산으로 나와서 시계포를 했다. 시계포도 목돈 마련하느라 동네 아줌마한테 곗돈 250,000원 타서 책상 하나두고 시계 줄 몇 개 갖다놓고 시계방을 차렸다. 남편의 이름을 따서 ‘승진당’ 으로 짓고 개업 날은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유리 장은 시계바늘이 한 칸 한 칸 자리를 옮기는 것이 다 보일만큼 닦고 또 닦았다. 시계포는 자리를 잡았고 입소문이 나서 먹고 살만했다. 그 와중에 남편의 친구들이 남편에게 택시사업이 돈을 번다고 바람을 잔뜩 집어넣었다. 남편은 1년 내내 ‘택시택시’ 노래를 불러 결국 택시를 사고 말았다. 그저 운전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시작하는 날부터 돈 걱정 마음고생이 떠날 날이 없었다. 하지만 살아갈 방법을 찾았고 주저앉아서 한탄만 하지 않았다.

성한 냄비가 없던 그 때 고단한 1인 5역

남편은 택시사업하면서 시계포에 시계기술자 한명을 두었다. 그는 시계기술에 도장까지 팔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난 어깨너머로 도장도 배우고 운전도 배웠다. 어릴 때부터 눈썰미가 제법이어서 한 달 동안 ‘김 자’ ‘이 자’ 시늉만 하며 배워나갔다. 새로운 세계는 크던 작던 경이롭다. 추석 지나고 손님이 왔다. 손이 바르르 떨렸지만 내색을 할 수 없었다. 그 5분의 시간이 얼마나 길었던지. 어느새 내 눈에 보이는 손님의 이름, 김 영 길.

‘아 하나님. 제가 도장을 팠습니다.’

시계포 할 땐 우리 집에는 성한 냄비가 없었다. 종종걸음 치다가 부엌에 들어가면 양은 냄비들이 통째로 새까맣게 타버린 건 부지기수였다. 부엌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냄비들이 생활고에 힘들어 숯처럼 타들어가는 내 마음인양 애처로웠다. 5남매 키우랴 가게 운영하랴, 손이 열개라도 모자란 고단한 때였다.

잘 살았노라!

아이들 키울 때까지 쌀독은 늘 바닥 긁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이제 우리 쌀독은 마르지 않는다. 아이들이 보내는 용돈, 거기에 나는 내 기술로 돈을 버는 엄연한 사장님이다. 그 어려운 시절을 용케 견뎌낸 그 시간의 아름다운 보상이다. 청춘을 나이로 매기는 것이 아니라면 난 진짜 청춘이다. 이제는 걱정이 없다.

작년 겨울, 우리 아이들과 제주도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우리 부부는 60년 전으로 돌아가 신혼부부마냥 손을 꼭 잡고 다녔다. 난 그 여행 틈에도 오래된 나만의 즐거운 습관에 빠졌다. 어디를 다녀왔는지 기분이 어땠는지...박스 상자 날개에도 쓰고 편지봉투라도 여백이 보이면 또 적었다. 쓰면 행복하다. 평생 공부하고 싶다. 기회는 어려움 속에서 슬며시 다가와 결국 고통이 나를 다시금 일으켜 세웠다.

내세울 것 없는 나의 삶을 존경해주는 우리 아이들. 자식에게 인정받는 것 만한 축복도 없다. 그래서 잘 살았노라! 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한낮 창가에 부서지는 햇살은 깜박 졸음을 데리고 온다. 꿈결을 따라 힘들었던 과거의 그날로 찾아간다. 그날도 이젠 그리움으로 남았다. 이만하면 자존심을 지켰고 餘恨(여한)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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