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에게는 힘이 느껴진다.
말에게는 힘이 느껴진다.

[고양일보] 이미 작고한 소설가 박완서는 노년에 다가오는 육신의 질병에 대해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젊었을 때는 이 몸뚱아리가 나를 즐겁게 해주었지만, 늙어서는 나를 힘들게 하여 짐이 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영혼이라 보았고, 육체는 자신의 영혼을 담는 그릇에 비유하여, 영혼의 입장에서 육체를 객관적으로 보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속사람의 영혼인 자신은 언제나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영혼을 담고 있는 겉사람 육신은 자꾸 변합니다. 영혼(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단계를 거쳐 점점 낡고 힘없어져 가기만 합니다. 그러다 한줌의 재로 훅~ 하고 바람에 날아가 버릴 존재라는 것입니다.

말은 힘의 상징입니다. 대개 영웅들은 말을 좋아하고, 나폴레옹을 비롯한 전쟁 영웅들은 말할 것도 없이 '힘깨나 쓰는 장수'들은 모두 말 위에 앉아 칼을 높이 든 용맹스런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그러나 이렇게 장군을 등에 태우고 전쟁터에서 용맹을 떨치던 그 힘있는 말들이 부상을 당해 회복 불가능하거나, 함께 이동하기도 불편할 정도로 더 이상 쓸모없는 늙은 말일 경우에는 그 말 주인들이 눈물을 머금고 그 자리에서 총으로 사살하는 것을 영화에서 많이 보아왔습니다. 이른바 안락사(安樂死, euthanasia)입니다.

사람에게 도움이 안 되고 짐이 되기만 한 말은 성가시고 귀찮은 존재가 되어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도 '고장난 자전거'가 되면 같은 입장이 됩니다. 말이든 자건거든 내가 타고 다닐 때는 나를 편하고 즐겁게 해주었지만, 고장이 나서 더 이상 탈 수 없게 되면 그때부터는 짐이 되어버려 골치 아픈 존재가 됩니다. 이럴 때 사람들에게도 안락사의 문제가 적용됩니다. 안락사(euthanasia)는 그리스 단어인 eu(good, well)와 thanatos(death)에서 유래했습니다. 안락사는 말 그대로 죽어가는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고 편안하게 죽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T.V에서 다큐 특집으로 방영한 바 있는 스위스의 조력자살 단체인 'EXIT'는 이 면에서 상당히 앞서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그 출구(EXIT)라는 것이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ENTRANCE)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말장난 같지만, 개인적으로 안락사(安樂死)는 반대했으나 존엄사(尊嚴死, death with dignity)는 찬성하고 있었습니다. 스위스의 EXIT가 지향하고 있는 바와 같은 이유에서였습니다. 사실 안락사나 존엄사나 그게 그거라고 생각되지만, 단어의 구별을 통한 내 나름의 합리성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안락사는 고통의 문제에 있어 육체적인 면이 강조되지만, 존엄사는 정신적인 면이 강조됩니다. 육체적 고통은 참을 수 있겠으나, 육체의 추함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인격적 모멸감을 느끼고 싶지 않다는 것이 좀 다르지 않는가 하는 항변조의 생각에서입니다.

지역의 자살예방센터 책임자로 있었을 때 나로서 안락사(존엄사) 문제는 항상 숙제였습니다만, 앞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스위스처럼 지금까지의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 탈출(EXIT)하고자 하는 시도는 더 급증하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러한 사회풍조가 동성애 문제처럼 크게 불거지고, 종교인들 사이에서조차 찬반 의견이 나눠지고 있는 시점에서 나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생명에 관한 것처럼 죽음 역시 철저히 신의 주권에 속한 문제라고 생각되어, 어떤 경우이든 인간이 사람의 생사문제에 대한 결정을 스스로 내릴 수 없다는 것으로 다시 선회한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변증론적 입장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살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죽지 않을 수 있는데, 그 십자가 죽음이 하늘 아버지의 뜻이라고 받아들여 그 죽음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하여 죽은 것이므로 이는 자살 행위와 같다는 주장입니다. 하기사 이것도 믿음이 있어야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지만, 중요한 것은 순교자처럼 죽음의 상황을 회피하지 않았을 뿐이지 스스로 목숨을 단축하여 끊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사형수들이 곧 들이닥칠 것만 같은 죽음의 공포를 이기지 못하여 빨리 죽여달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극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노숙자들 역시 힘없는 서러움을 호소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그들 안에 실오라기 같은 희망이 있어 그렇기도 하겠지만, 이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생명보존의 법칙과도 같습니다. 어차피 죽을 것인데 미리 죽겠다고 하는 것도 웃기는 이야기라면, 이는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두가 사형수처럼 모두 죽음 앞에 서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뭐 그리 서둘러 죽을 필요가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우리는 누구나 다 자연사(自然死)의 죽음을 맞게 될 테니까 말입니다.

육체의 고통을 단축시키기 위한 안락사이든, 정신적 모멸감을 극복하기 위한 존엄사이든, 아니면 정말 자신의 존재가 이 세상에 아무 쓸모 없고,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만 끼치는 해충과도 같은 존재이기에 세상의 평화에 기여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한목숨이 빨리 없어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서이든, 그 어떤 이유이든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할 사람과 죽어 없어져야 할 사람을 어떻게 구별하여 기준을 내릴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관건입니다. 각자가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으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가치 평가를 하는 것일 뿐이지, 객관적인 기준이 어디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라 법으로 죽어야 할 사형수만 예정된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실 우리 모두 죽음을 코앞에 달랑거린 채 달고 사는 사형수와 같은 존재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죽음의 문제에 대해 섣부른 판단의 잣대를 휘두르며 함부로 말할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생각으로 실용주의적인 입장에서 우리는 용도에 따라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려고 합니다. 생산적이냐 소비적이냐 하는 합리적 사고로부터 시작해서 우리는 사람들을 획일적인 틀에서 가치를 말하고 암묵적 기준을 정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현실적인 면에서 "I love you(당신을 사랑해)"보다 "I need you(당신이 필요해)"라고 자기중심적으로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사랑은 추상적으로 들리며 내가 상대방에게 다가가는 듯하지만, 필요는 구체적이며 상대방을 내게 끌어당기는 더 강렬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늙고 병든 노인이나 심각한 장애로 이웃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스스로 설 수 없는 힘없는 사람은 이 '아름다운 세상'을 추하게 만들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이웃에게 부담으로 짜증주지 않도록 세상에서 그 존재를 감추어야 옳은 것입니까? 상처있는 사람은, 힘이 없어 남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잉여인간이나 진 배 없으므로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까?

싱싱한 북해도 청어 이야기를 아시지요? 북해도에서 잡은 청어를 싱싱한 채로 운반하기 위해 청어의 천적인 곰치를 그 안에 집어넣어 청어들이 곰치에게 잡혀 먹히지 않으려 도망다님으로 오히려 싱싱하게 살아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물론 한 예화에 불과하지만, 우리의 삶 역시 그와 같습니다. 인간적 관점에서 나를 핍박하고 괴롭히는 나보다 힘센 강자로 인해 내가 더욱 삶의 애착을 갖고 강인하게 살아가듯, 마찬가지 역으로 우리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그야말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우리 옆의 나약한 사람들로 인해 우리는 내 삶의 존재 의미를 찾게 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때로 이들이 눈에 가시처럼 우리를 귀찮고 성가시게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들이 우리 이웃에 있기에 우리로 하여금 내가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돌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저들을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는 삶의 이유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때로 나 자신의 삶이 참으로 무가치하고 무기력하여 삶의 의미를 깨닫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이 땅 위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짐스럽고 힘들게만 여겨질 때가 있지만,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도 나의 약함 때문에 내 등 뒤에서 긍휼의 마음으로 울고 있는 또 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자에게 거지 나사로가 그 양심의 잣대 역할을 했던 것처럼 약자는 강자에게 또 다른 의미에서 표상이 되고 있으며, 빈자는 부자에게 탐욕의 수치를 조정케 하고, 힘없는 자는 힘있는 자에게 그래도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자기 성취감을 주기도 합니다.

세상은 '힘의 논리' 가운데서 힘센 강자만을 선호하고 때로 강함 자체가 선의 기준이 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세상살이가 힘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의 성공 기준이 이 힘의 논리에 의해 규정화 되기 때문입니다. 성공이 무엇이고, 강함이 어떤 강함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이라고 해서 힘있는 말만 살아간다면 이 역시 재미없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힘있는 말도 언젠가는 늙고 병들어 힘없는 말이 될 것이고, 이러한 삶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이끌고 밀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삶의 순환논리들을 통해 우리는 더욱 폭넓고, 깊고, 풍요하며 아름다운 세상을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모두는 살아 숨쉬는 것 자체만으로도 삶의 존재 의미와 이유를 생각하며 감사할 일입니다.

시인, 청마 유치환의 시, <행복>의 끝 소절을 옮깁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느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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