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일 시인의 신간시집 <<동네 한 바퀴>>(2016. 9.)는 근래에 보기 드문 특이한 시적 상상세계를 보여주는 시집이다. 독단적이고 뿌리 없는 논리들, 유희적이고 자폐적인 감수성들, 빈곤하고 허황한 상상력들이 어지러이 뒤엉켜 요사스런 난무亂舞를 펼치는 작금의 한국시단의 상황 에서 출간되는 하재일의 이번 시집은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시가 처한 바로 그 위중함과 참담함 때문에 시의 절실한 자기반성을 알리는 시의적절한 시집으로도 읽히게 된다. 시집 <<동네 한 바퀴>>엔 국적없는 논리와 개념이 없고, 진솔한 삶의 기억이나 구체적 생활에 닿지 않은 허튼 감수성이 없으며 알찬 뿌리를 내린 사유를 동반하지 않은 시적 상상력은 찾아볼 수 없다.

표제작인 <동네 한 바퀴>는 이번 출간된 하재일의 시집이 지닌 시정신의 이와 같은 특성과 속 깊은 감성과 상상력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절창으로 꼽을 만한 시편이다. 이 시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따끈따끈하고 쫀득쫀득한 강원도 찰옥수수가 왔어요. 맛있는 술빵이 왔어요. 동네 한 바퀴, 부지런히 도는 트럭 한 대. 꽁무니 따라가며 동네 한 바퀴 천천히 도는 내 발걸음. 사람들은 한 명도 모이지 않고 봄밤에 꽃망울 부푸는 벚나무들만 쳐다보고 자기들끼리 키득거리네.

꽃나무 아래엔 온종일 홀로 거리를 지킨 빨간 우체통. 오늘 입에 넣은 건 어느 불량한 길손이 던져 준, 피다 버린 꽁초 한 대뿐. 그래도 이웃이 좋아 주소를 옮길 수 없네.

환하게 꽃 핀 알전구 매달고 열심히 돌아다니는 동네 한 바퀴, 두 바퀴로 이어지는 트럭 한 대. 벚꽃보다 지름길을 알고 먼저 왔네. 목련보다 먼저 달려왔네. 아직 일러 꽃은 불을 켜지 않았고 봄이 오는 밤길을 환하게 비추며 지나가는 트럭 한 대. 오늘 판 거라곤 겨우 해질녘 꼬부랑 할머니가 팔아 준 술빵 한 봉지. 누구나 편안한 물컹대는 밤인데.

나 홀로 천천히 걸어보는 동네 한 바퀴, 서서히 길들이 어둠 속에 잠겨가네.

                                      ―<동네 한 바퀴> 전문

잠시, 이 시를 분석하고 해석하기 전에 이즈음 문학에 대한 일반론적인 선입견과 편견 혹은 고정관념을 경계해야 할 필요성에 관하여 선결적으로 말해두는 것이 좋겠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인문학 열풍이 휘몰아치는 특별한 시절을 맞이한 듯하다. 대학에도 지자체에도 SNS 모바일 등 디지털 세계에도 문학 미술 음악 등 예술 영역을 비롯하여 동서고금의 고전 배우기 등 인문학을 배우고 도서관에 축적된 엄청난 량의 학식들을 함께 나누려는 사람들로 만원이다. 그리고 북새통을 이룬 인문학 강의실 정면에는 유행이 된 표어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큼직한 현수막이 걸려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인문학을 둘러싸고 마구 불어대는 어지러운 바람이 과연 한국인의 마음 속에 또 한국 사회에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다 줄 지는 의문이 든다. 의문이 든다는 말은, 지금의 인문학 열풍이 근대 이후의 외래적인 인문학에 대한 주체적 반성을 수반하고 있는가, 또 한국인이 ‘지금-이곳에서’ 겪고 있는 구체적 삶의 현실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인문학인가 따위를 깊이 성찰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또한, 흔히들 믿고 있듯이 학습을 통한 인문학적 박식이 자연과 생태 속에서 몸소 배우는 앎이나 사회에서 시간고난 겪고 사는 인생살이에서 힘겹게 터득하는 앎보다 과연 더 따를 만한 앎이고 더 유익한 앎인가. 인문학자 또는 문예학자들이 곧잘 내세우곤 하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과연 옳은가? 물론 ‘아는 만큼 보인다’는 주장은 그렇다고 할 수도 그렇지 않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리(道)를 찾고자 하는 이, 여기서 논의하는 문예라는 형식을 통해 진리를 구하고자 하는 이에겐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구도자에겐, ‘아는 만큼 보이는 게 아니라 아는 만큼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모르는 만큼 보인다’고. 사람들이 책과 학습을 통해 열심히 쌓아올린 학식들이란 것이 오히려 참된 앎 혹 진리(道)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는 선입견이나 편견 혹은 고정관념으로 작용하는 경우는 허다하다.

특히 문학예술을 통해 진리를 만나고자 사람에게 인문학 혹은 문예학의 학식은 늘 ‘아는 만큼 모르고 아는 만큼 보이지 않는 것’이 될 가능성은 크다 할 것이다. 입력된 학식이 타고난 본성 혹 자연적이고 자유로운 감성의 활동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문학 혹은 문학예술을 공부하는 이는 늘 ‘아는 만큼 모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자문과 동행해야 한다. 더군다나 진리에 접근하려는 이에게 모든 학식에 대해 그 근원에서부터 회의하는 자세는 필수적이다. 회의 없이 축적된 인문학적 지식들이 외려 문예 작품의 감상에 속단과 예단豫斷을 불러들이고 피상에 흘러 허구를 진실로 둔갑시키는 예를 수없이 보아 왔다. 어설프게 학식을 더하고 더하는 것은 학문과의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대화 관계를 해치고, 문예 작품의 올바른 이해를 방해하고, 진리의 구현으로서의 문예 활동의 이상을 가로막는다. 특히 문예의 창작과 감상에 있어서 학식은 버림만도 못하다.

두루 아다시피 노자(老子)는 진리(道)에 이르는 경지에 대해 말하면서, ‘학學을 하면 날로 더하고 진리(道)를 하면 날로 덜어낸다. 학식(學)을 덜어내고 덜어내어(損之又損) 무위의 경지에 이르면 함(爲)이 없으면서도 하지 않음이 없다.(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는 것을 강조하였다. 노자의 이 말씀을 신라 때 원효(元曉) 스님이 받들어서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에도 인용한 바, ‘학식(분별지)’을 더하고 더하는 것은 욕심만 더할 뿐, 진리(眞如)를 깨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역설한 바 있다.

하재일의 시집 <<동네 한 바퀴>>는 속세의 삶에서 진리의 빛을 찾는 구도의 시편들로 엮여 있다. 그 구도의 정신은 무위자연로서의 인간 정신 혹은 진여의 자각인 듯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시집에는 자연으로서의 인간 정신을 자각하고 인간주의 영역을 넘어 나 이외의 타자들 그것이 생물이든 사물이든 이질적인 존재들과의 근원적인 만남과 소통을 꾀하는 시의 존재론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 아집我執에서의 해방을 통해 참자아를 찾고 동시에 일체 존재의 해방을 추구하는 시 정신과 깊이 연루된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하재일의 시 정신을 깊이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시적 진리를 학식을 통해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이다. 이는 그의 시세계가 어떤 개념이나 지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저만의 독자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와도 통한다. 시인은 고상한 학식의 세계를 애써 마다하고 서민들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삶 속에서 기꺼이 체득한 투박한 일상어로서 시적인 것의 진실과 함께 자연으로서의 진리의 정신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처럼 시인의 절차탁마하는 시 정신이 다다른 막다른 절정이 시집의 표제작 <동네 한 바퀴>이다.

하재일의 시 <동네 한 바퀴>를 반복해서 읽으면 시인의 특별한 상상력과 특유의 감성과, 마침내 진리향眞理香이 배어있는 시 정신이 서서히 실감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는 시인의 세계관이 무엇보다 시어들의 결합과 조합이 만들어내는 특이한 느낌과 함께 시문들이 이루어내는 음악성과 연관이 깊다는 말이다. 시에서의 음악은 정형화된 율격을 뜻하지 않는다. 시에서 율격은 내재율로서 어떤 정형화된 율격으로 규정할 수 없고 그 자체로 순수하고 절대적인 것으로서의 내적 화음和音이다. 시의 음악성은 시의 특징을 보여주는 추상으로서 정신적 인상印象이다. 시의 정신적 인상으로서의 음악성은 시가 지닌 절대적 느낌이며 시의 순수한 내용을 드러낸다.

<동네 한 바퀴>는 일단 아래 두 방향에서 살펴볼 수 있다.

(1) 이 시가 보여주는 특별한 상상력은 ‘빨간 우체통’ ‘벚나무’ ‘목련’ 등 만물萬物에 접물接物하고 화생化生하는 상상력이랄 수 있다. 접물하고 접신하며 마침내 화생하는 상상력! 이에 대해 누군가 반문할 수 있다. 빨간 우체통과 벚나무와 목련을 의인화하는 것은 흔하디흔한 일반론에 불과한 문학적 상상력 또는 인문학적 상상력이 아닌가, 라고! 물론 이러한 반문에 대해 ‘그렇다’고 대답해야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렇다’고 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아닌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시적 상상력을 통해 빨간 우체통과 자전거와 나무를 화생化生하여 그것들에게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했다는 것을 두고서 기존의 인문학적 학식을 따라서 의인법으로 간단히 규정하는 것은 근시적 관점에 불과한 것이다. 근시적 관점은 시의 심연이나 사단事端의 근원을 보는 원시적 관점을 놓치고 마는 단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시가 보여주는 화생의 시적 상상력이 사물 혹은 자연에 대한 근본철학에서 연원한다는 해석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를 밝히기 위해서는 결국 이 시가 품고 있는 시인의 상상력과 언어적 감성의 내막을 찾아 분석할 수밖에 없다. 시의 심연의 분석을 통해 만물의 화생 곧 접화군생接化群生하는 시적 상상력은 이 시가 품고 있는 음악적 신명神明의 언어들을 통해 그 표현을 얻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 예는, 이 시가 “따끈따끈하고 쫀득쫀득한 강원도 찰옥수수가 왔어요. 맛있는 술빵이 왔어요.”라는 생생한 소리체 문장으로 시작되고 있다는 점을 우선 들 수 있다. 가난한 술빵 장사꾼이 내는 활력 넘치는 목소리가 시에다 음악적 정감을 일으키는 것이다. 또한 모든 시어들은 음감의 크기와 높이만 다를 뿐 서민적 음역音域을 확실히한다는 점. 곧 생활과는 동 떨어진 개념 언어들은 사라지고 서민들의 실감 나는 생활언어와 한 몸을 이룬 시어로 쓰였다는 점. 일상 속에서 마주치는 정겨운 사물들의 이름과 구체적 생활에 밀착한 찰기로 진득한 서민적 언어들이 시인 특유의 분방한 상상력 속에서 새로운 음감音感의 시어로서 새로이 태어나는 것이다. 특히 하재일의 시집 전반에 걸쳐서 고유지명, 동식물들의 고유이름, 지역 방언 등 고유어들이 많이 쓰이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이 서민적 언어로서 시의 음악적 신명神明을 불러들이려는 시적 상상력 ---접신적인 접물接物의 상상력이 내재화된!---과 맥락을 같이한다.

또한, “꽁무니 따라가며 동네 한 바퀴 천천히 도는 내 발걸음”은 이 시의 내재율 또는 시의 음보音步를 느끼게 하며 이는 시의 안팎에서 감응되는, 천천히 소요하듯 하는 ‘내 발걸음’과 가만히 혼잣말하는 듯 하는 시의 음보 또는 내재율이 서로 하나를 이루고 있음을 반영하는 듯하다.

특히 여러 시어들 중에서 우선적으로 종결어미 ‘~(하)네’로 쓰인 문장들로부터 이 시가 지닌 나지막한 음조音調와 화음和音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 시를 읽는 행위는 마음에 이는 화음을 따르는 행위와도 같기 때문에 이 시가 지닌 음감 또는 화음은 이 시가 표면적으로는 객관적 현실과 자연을 담담히 서술한 듯이 보이지만, 그 리듬과 화음으로 인해 시의 이면에서 객관적 현실이나 자연 현상과는 무관한 순수 내면 혹은 순수 정신이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시의 이면에 현실의 삶과 시를 쓰는 자아를 가만히 관조하는 구도자로서의 또 다른 시적 자아가 동행하고 있음을 뜻한다.

(2) 이 시가 종결어미가 사라진 명사형 시구들과 종결 어미인 ‘~(하)네’로 된 문장들로 반복하면서 짜여진 시라는 점을 다시금 살필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종결어미‘~(하)네’의 문장들은 내용상 객관적 외부 사실에 대한 단순 서술문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지금-여기의 삶’ 속에서 어떤 진리의 깨달음을 독백조로 말하는 서술문이라는 점에 있다. 곧 이 시에 쓰인 모든 ‘~(하)네’라는 종결어미의 문장에는 깨달음을 묵언默言으로 삼킨 시적 화자의 나지막한 감탄의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시적 화자의 깨달음이 학식이나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지금-여기서’의 생활의 결과라는 사실은 다시금 중요시되어야 한다.

시의 1~4연 각 연에 나오는 종결어미 ‘~하네’의 문장들, “봄밤에 꽃망울 부푸는 벚나무들만 쳐다보고 자기들끼리 키득거리네.”(1연) “꽃나무 아래엔 온종일 홀로 거리를 지킨 빨간 우체통. 오늘 입에 넣은 건 어느 불량한 길손이 던져 준, 피다 버린 꽁초 한 대뿐. 그래도 이웃이 좋아 주소를 옮길 수 없네.”(2연) “벚꽃보다 지름길을 알고 먼저 왔네. 목련보다 먼저 달려왔네.”(3연) “나 홀로 천천히 걸어보는 동네 한 바퀴, 서서히 길들이 어둠 속에 잠겨가네.”(4연) 등은 표층적으로는 흔히 쓰는 의인법擬人法에 따른 시적 표현인 듯하나, 심층적으로는 시인이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체득한 천진난만한 상상력에 의해 무생물조차 접물接物하고 활물活物하고 화생化生하는 시정신의 산물로서 읽혀야 한다. 의인법은 이성의 기교와 인간주의 논리를 따르는 시의 형식이라 할 수 있지만, 이 시에서 가령, ‘빨간 우체통’ 같은 무생물의 화생 혹은 ‘벚나무’의 의인화는 시인이 구체적 삶의 현장 속에서 터득한 진리의 깨달음이 작용한 화생(접화군생!)이요 의인화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이 시의 경건한 접물의식을 통한 화생과 의인법은 자연으로서의 인간정신의 작용력에 대한 순정한 깨달음의 자연스런 소산이다. 한 예로서 “온종일 홀로 거리를 지킨 빨간 우체통.(…) 이웃이 좋아 주소를 옮길 수 없네.”에서 보듯이, 이 시에서 ‘빨간 우체통’의 화생 혹은 의인화는 문학적 지식에 따라 흔히 차용되는 의인법이 아니라 긴 생활의 어둠을 견디며 진리의 빛에 닿기 위해 타락한 현실을 이겨낸 시인에게만 주어지는 시적 보상이다. 이 시에서 느껴지듯, 무위로이 소요하듯 하는 음보를 타고 시적 자아는 세속의 가난한 생활 세계 속에서 생물 무생물간의 차별, 피아彼我간의 차별 너머의 생명과 생명이 필연적으로 관계 맺고 살아가는 근원적이고 초월적인 ‘온생명’의 세계를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보라.

꽃나무 아래엔 온종일 홀로 거리를 지킨 빨간 우체통. 오늘 입에 넣은 건 어느 불량한 길손이 던져 준, 피다 버린 꽁초 한 대뿐. 그래도 이웃이 좋아 주소를 옮길 수 없네.

이는 무위자연으로서의 정신이 낳은 시의 결정이며, 옛 풍류도 정신의 핵심인 접화군생接化群生하는 능력이 전승된 독특한 상상력의 시적 결실이라 할 만한 것이다.

‘강원도 찰옥수수’ ‘술빵’을 파는 가난한 장사꾼의 ‘트럭 꽁무니’를 따라 함께 동네를 한 바퀴, 두 바퀴 도는 시인의 마음속에 진여의 마음 혹은 무위자연의 도道의 작용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술빵 장사꾼의 트럭을 따라 동네 한 바퀴 두 바퀴 함께 돌고도는 시적 자아의 하염없는 마음을 진정으로 접한다면, 저녁 예불을 마친 뒤 절간 마당에서 두 손을 모으고 한 바퀴 두 바퀴 탑돌이하는 불심佛心 혹은 대승大乘의 바퀴로서의 참자아를 찾는 수행심修行心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외된 이웃을 따라 동네 한 바퀴를 함께 돌고 또 도는 시인의 마음은 자아와 타아간 차별이나 속세와 초월의 분별을 넘어 진리 속에서 참나를 찾아가는 순례자의 마음을 닮았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지금–여기서’의 참다운 자아 곧 속계에서의 참나를 찾아가는 구도求道의 알레고리가 ‘동네 한 바퀴’라는 시어 속에 들어있다 할 것이다. 어쩌면 이 지점에 이르러서 이 시가 지닌 더 깊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우리 삶에 대한 깊은 이야기들을 새로이 준비해야 할런지도 모른다.

 

  타락한 속세에 속박된 시어를 해방하고 진실의 시를 구하고자 한다면, 상습적인 시어와 상투적인 시상詩想을 근원적으로 회의懷疑하고 무분별無分別과 자유분방의 시상에 이르려는 시의 자기 일탈의 모험과 구도求道적인 자기 부정의 정신은 필연적이다. 이 도중道中에서 하재일의 시는 수많은 이질성들이 서로 접하여 관계 맺고 살아가는 생명계의 본성을 각성하고 시의 본성을 깊이 성찰한다. 비근한 예로 ‘은행나무’와 ‘자전거’(「자전거는 푸르다」)같은 이질성의 결합, ‘못’이라는 언어개념이 품고 있는 자기 부정의 이질성들(「방생」)을 통해 분별지의 언어와 무분별지의 언어, 집착의 시상과 자유의 시상을 함께 반성하고 통찰하는 것이다. “나무와 자전거의 결합이 상처뿐인 생이 아니라/ 둘의 맹세인 옹이로 변해 잎은 푸르러지는 것이다.”같은 시적 비유가 말해주듯, 거리낌 없는 시정신은 경험과 선험, 분별과 무분별, 현실과 환상 또는 주술, 접신 간을 무차별적으로 결합하면서 나무와 자전거 같은 뭇사물들에게 생명력을, 마침내 시에 이질적이고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다. 그러니 하재일 시의 깊이에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선가禪家 정신과 접화군생接化群生의 풍류 전통의 맥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곧 하재일의 시편들이 보여주는 파격, 비약, 돌발, 낯섬, 투박, 순박의 시상들은 생물 무생물 인간 미물은 물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간에 차별 없이 일체 만물을 겸허하게 포용하고 기꺼이 접하며 그에다 생기를 불어넣어 더불어 변화하려는 시인의 순정하고 가난한 마음과 천진난만한 상상력(‘동화적童畫的 · 童話的 상상력’이라 이를 만한!)이 빚어낸 시정신의 결정이라는 점을 깊이 이해하며 그의 시를 접할 필요가 있다.

[하재일 시집 <<동네 한 바퀴>> 솔출판사 . 2016.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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