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쌓인 묵은 종이 냄새, 느린 시간 속을 걸어온 책갈피 향기, 손때 묻은 책을 맘껏 뒤적여도 좋았던 눈치의 여유.

고양시 한 자리에서만 16년, ‘책창고’에서는 우리가 기억하는 헌책방의 추억이 잘 잡히지 않는다. 헌책방 사이트에 입력할 책 뭉치가 한편, 매일이다시피 입고되는 책들이 뭉치가 되어 또 한편, 헌책들이 엉기어 공간을 맴돌고 있다.

“사이트에 책들을 입력하려니, 정리를 제대로 할 수가 있나…. 어차피 오는 사람도 몇 안 되고, 들어오는 책을 막을 수도 없고…. 허허, 그거 참, 허허허.”

2001년부터 후곡마을 17단지 상가 지하 한 자리를 지켜온 헌책방 '책창고'.

2001년 일산점이 문을 열 때부터 ‘책창고’지기로 살아온 성인경(65세) 사장은 그나마 후불제를 헌책방의 미덕으로 꼽았다.

“인터넷으로 주문하고도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어요. 헌책이야 후불이니까. 책방에서야 안사도 뭐라 할 사람이 없거든. 맘에 안 들면 다른 책 가져가면 그만이지. 그게 여기 남은 마지막 낭만이 아닐까 싶네.”

툭툭 던지는 한마디 말끝마다 아쉬움이 묻는다. 휴일도 없이 나와 책방을 지키지만 손님 얼굴 보기는 매일이 아쉽다. 몇 년 됐다. 손님도 수입도 반의 반 토막으로 내려앉은 세월이.

성인경 사장은 오후 2시~8시, 주말도 없이 책창고를 지킨다.

헌 책방에 깃든 ‘헌 책’은 초라하지 않다

어느 날인가,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한 남자가 ‘책창고’를 찾았다. 70년대 사라진 출판사의 책들을 구한다 했다. 말을 아끼는 남자의 표정은 진지했다. 성인경 사장은 전국 헌책방에 다리를 놓았고, 헌책방 사이트를 이 잡듯 뒤져 어렵사리 한 권을 찾을 수 있었다. 남자는 책을 품에 받자마자 고개를 묻더니 이내 눈물을 쏟았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출판사입니다. 하루아침 무너지는 바람에 책 한 권을 챙기지 못했어요. 그렇게 공을 들이셨는데….”

남자는 성인경 사장 앞에서 한참이나 어깨를 들썩거렸다.

‘책창고’와 함께 늙어가는 단골손님도 있다. 정기적으로 헌책을 구입해 달동네에 기증한 나눔의 손길이 30년, 그중 16년은 ‘책창고’가 채웠다. 봉사를 위해 도서관 사서 업무까지 익힐 정도로 열정이 대단한 손님이란다. 그런 손님 하나의 마음을 채우는 일, 책 한 권을 찾는 책 손의 정성을 헤아리는 일이야말로 성인경 사장이 어려운 ‘책창고’ 살림을 이어가는 생각이고 힘이다.

헌 책방은 책과 사람이, 시대와 사람이 소통하는 여백의 공간이다.

지식의 통로, 소통의 길

“해방 전 고서나 초판 시집들은 현금과 같아서 언제라도 팔려요. 그런 책을 계속 구할 수 있다면야 무슨 걱정입니까?”

성인경 사장은 양극화 되는 헌책방의 현실에 씁쓸한 표정이다. 전통적인 헌책방에는 열정적인 수집가들과 가난한 열독가들이 공존했었다. 지금은 책의 물적 가치만 셈하는 마니아들 아니면 인문학으로 포장을 덧댄 자기계발서에나 손이 머문다.

새 책의 출판과 소비가 줄었다. 부피 큰 전집은 인터넷 정보에 밀려났으며 대학입시 제도조차 책을 권하지 않는다. 성인경 사장은 헌책방이 골목으로 밀려 사라지는 이유가 대형 중고 서점 탓만은 아니라 했다.

“책을 안 읽잖어. 그게 젤 큰 이유지. 책을 읽어야 그게 중한 것을 알고, 애들도 읽히고 자기도 읽지.”

문화는 다양성에서 시작된다. 다양한 삶을 만나는 해답은 책 한 권이 지름길이다. 마을을 지켜 온 헌책방의 가치는 소비를 향해 달려가는 대형서점의 그것과는 다르다. 책 하나하나가 한 권 뿐인 가치, 돌고 돌아도 낡지 않는 콘텐츠를 전하는 헌책방의 노고는 충분히 치켜세울 일이다.

서울시는 2015년부터 ‘한강몽땅축제’에 헌책 10만 권을 모아 ‘헌책방 축제’를 열고 있다. 신촌 대학가에서는 2015년 6월부터 헌책방 주인들이 추천하는 책 3권을 무작위로 골라 상자에 담아 판매하는 ‘설레어함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서울도서관은 헌책방 거리의 상징인 청계천 오간수교 아래에서 ‘헌책 다방 행사’를 3년째 이어가고 있다.

책과 사람이 소통하는 헌책방의 여백을 살리는 건 작은 정책이어도 좋다. 헌책방 주인들은 큰 재미 못 봤다지만, 어디 한걸음부터 큰 걸음이 있을까. 고양시 헌책방들이 마을 주민의 우물가 같은 쉼터로 남는 길, 고양시의 ‘한걸음 덕’ 작은 정책 없이는 버겁다.

 

책창고(문의 031-916-5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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