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일보] 아버지는 못 말리시는 분이었다. 한참 젊은 시절, 당신 위주의 자유분방한 삶을 사셨다. 그래서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외항선 항해사로 넓은 바다의 세계를 돌아다니며 그래도 뭔지 풀리지 않는 인생의 수수께끼로 방황하는 방랑자의 삶을 사셨다. 가정과 가족마저도 당신을 묶어 두지 못했다. 항상 먼 산을 바라보며 고뇌하는 얼굴로 '길'을 찾았다.

바다에 나가 있는 동안 외아들이었던 당신에게 극진한 부정(父情, paternal love)을 베푸셨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들로서 아버지의 임종도 지켜드리지 못한 불효의 자책감과 방황하는 삶을 살면서도 그토록 마음으로 의지했던 아버지의 죽음으로 더욱 혼란스러워진 당신은 강한 태풍으로 부서진 난파선이나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표류선처럼 당신의 삶은 더욱 흔들렸다.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느 순간 아버지의 삶은 급변하였다. 나름 당신의 길을 발견한 것처럼 새로운 삶의 인생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신은 더욱 못 말리는 사람이 되었다. 주위의 여건에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의 길을 가기로 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덜컥 신학교에 들어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이산가족이 되었고, 할머니와 어린 동생 그리고 중학생이었던 나만이 그의 곁에 남아, 당신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만 했다. 갑작스레 광야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1980년 중반, 수도권 변방 고양시 원당은 원주민들을 제외하면 가까운 서울에서 밀려 나온 서민들의 도피처와도 같았다. 원당 한구석 흙벽돌로 된 낡은 기와집 터에 보증금 없이 방 한칸 월세 2만원 집이 마련되었다. 이때부터 우리는 '변두리 인생'이 시작되었다. 이런 환경 속에도 당신은 항상 싱글벙글하며 신학교를 열심히 다녔다. 나는 당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가족들이 덩달아 고통받게 하는 아버지가 미웠다. 어린 중학생의 마음 한구석에 아버지를 미워하며, 당신이 원하는 삶이 아닌 삐뚤어진 삶을 살겠노라고. 그리하여 당신 역시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고자 하였다.

갑자기 급변된 삶에 제대로 적응도 되지 못한 채 아버지에 대한 불평불만으로 힘들어 하고 있던 어느 날 당신은 나로서는 잘 알지 못하는 친척 형 둘을 데리고 왔다. 형들이 당장 있을 곳이 없기에 당분간은 우리와 이곳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기겁하셨고, 우리는 너무 기가 막혀 눈만 껌벅거리며 당신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우리 네 식구도 제대로 발도 못 핀 채 오므린 채 새우잠을 자야 하는 판국에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결국, 그 형들은 주위 잘 아는 개척교회 빈 예배당에서 잠자리를 해결하기로 하고, 새로운 패턴의 삶이 시작됐다.

이 당시 나는 예민한 사춘기의 중학생으로 갑자기 변하게 된 내 인생의 변모에 절망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이 형들이 오고 난 후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다. 자기연민에 빠져 내 생을 저주하며 신세 한탄을 하던 내 마음이 점차 누그러들고 형들을 보면서 나 자신의 처지보다 형들의 아픔이 느껴지면서 형들에 대한 긍휼한 마음이 생기자 나의 아픔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때부터 나는 형들에게 다가가 형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애썼다. 오갈 데 없는 형들에 비해 나는 집이 있고, 그래도 나를 챙겨주는 할머니와 보호자로서의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게 생각되는지 몰랐다.

이 시절 우리의 행복은 아주 작고 단순한 것이었다. 토요일 저녁 지금은 아파트촌으로 변해버린 원당 사슴 목장 앞 큰 길가에 나란히 앉아 근처 빵집에서 사 온 앙꼬빵 하나와 우유 하나씩을 들고 맛있게 먹으며 당신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지금도 기억되는 것은 당신의 이야기 중에 바다 생활할 때 넓은 태평양 한가운데서 직접 인어를 봤다는 것이다. "에~이, 그런 거짓말이 어딨어요?" 하고 당신의 이야기를 일축했지만, 아버지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정말이라고 답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때 만난 인어와 단둘이 대화까지 했다고 하는 대목에서는 어디까지 당신의 말을 믿어야 할지 긴가민가했다. 지금까지도 그의 인어 이야기는 미스테리(mystery)다.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와 아들

결국, 결국... 아버지는 목사가 되었다. 서울에서 잠시 부목사 생활을 하다가 원당에서 일산을 중심으로, 그 반대편인 금촌에서도 가장 외진 버스 종점 상가 2층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제2의 인생 무대를 열었다. 맨 시멘트 바닥의 공간을 가운데 막아 앞쪽은 방석 깐 예배당 그리고 뒷쪽은 사택으로 시작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곳에서 어찌 살았나 싶다. 순례자 아닌 세상에서 갈 곳 없는 뜨내기 나그네들이 지나다니며 수시로 출입하여 우리 가족의 삶 전체를 어렵게 할 때가 많았다. 나중엔 외국인 근로자까지 합세하여 좁은 방에서 공동체 아닌 공동체의 생활을 해야 했다.

원당 시점으로부터 지금까지 35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에 아버지는 은퇴하여 28년 섬기던 교회의 원로 목사가 되셨다. 나와 동생도 목사가 되어 지금 일산에서 형제가 함께 동역(同役)하며 열심히 목회를 감당하고 있다. 그것뿐이 아니라, 원당에서 함께 지낸 친척 형도 목사가 되었고, 금촌에서 함께 한 방에서 딩굴던 인도의 John과 필리핀의 Lito 역시 목사가 되어 아버지를 영적 아버지로 모시고 지금까지 왕래하며 각기 자신들의 본국에서 열심히 목회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 다윗이 억울하게 사울 왕의 칼날을 피하여 도망다니던 어려운 시절에 피난처로 삼아 숨었던 곳이 아둘람 굴(adullam cave)이었다. 나는 우리 가족의 인생 여정을 생각할 때마다 특히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다윗의 아둘람 굴을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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