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일보] 나의 자유분방한 라이프 스타일을 부러움으로 말하는 후배 목사에게 “내가 만일 틀에 박힌 제복의 직업군인이었다면 어땠을 것 같느냐?”라고 물었습니다.

후배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한참을 고민하며 생각하다가 “잘 모르겠다”는 엉뚱한 대답을 했습니다.

물론 후배는 나의 내면세계의 자유를 말했지만, 현실의 우리 삶은 내면과 외면을 뚜렷이 구별해서 살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또 양면이 서로 너무 동떨어진 형식을 취하게 되면 외부 사람들은 물론 자신도 때로 내적 갈등을 겪으며 이율배반적 혼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왜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회피하느냐고 묻자 후배는 그야말로 나에 대해 “한 마디로 정의내리기 어려운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내가 군인 생활은 절대 못할 것 같으면서도, 일단 시작하면 매우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 대답이 나에 대한 관점으로 가장 적합하고 또 이 대답을 좋게 여겼습니다. 처음엔 알 수 없는 듯한데 실제 가까이서 파보면 금방 그 속이 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보여지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는 것 같은데 실제 파보면 양파껍질처럼 벗겨도 벗겨도 종잡을 수 없는 미스테리한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나는 후자를 더 좋아하고 또 그렇게 되고자 노력합니다만 사실 이런 일들이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닙니다.

내가 더 이상 나에 관해 보여 줄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 사람은 초라해집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나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적한 라오스 시골마을의 풍경
한적한 라오스 시골마을 풍경, 배가 물 위에 떠있되 그 물이 배 안으로 스며들어와 배를 침몰시키지 못하도록 잘 막으며 떠 있어야 하는 것처럼, 세상 안에 있되(in the world) 세상에 속하지는(of the world) 말아야 한다.

인기 연예인이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하는 행위들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한 번 멋지게 인기를 끌었는데 그다음에 내놓을 카드가 없어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절망감에 빠져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악성 댓글 같은 것을 접하면서 사람들이 더 이상 나를 좋아하지 않고 나를 버렸으며 이제 나를 미워하기까지 한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최근 연예인들의 빈번한 자살은 여러 의미에서 현대인의 삶의 존재 방식을 진단해야 하는 숙제를 주고 있습니다.

언론은 토픽 뉴스거리를 만들기 위해 자신들이 그렇게 부추켰으면서도 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악성 댓글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제 정부에서마저 나서서 악성 댓글에 대한 규제를 해결책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이미 이토록 뒤틀려버린 사회문화를 어떤 제도적 장치로 통제할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의 사회 역사는 이렇게 되는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처음은 잘 되는 것 같으나 두더지 게임처럼 이것을 잡았다 하면 저쪽에서 또 다른 것이 고개를 내밀고 오히려 전보다 더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일 정도의 위력을 가진 악성 댓글은 경쟁 시대·경쟁 사회·경쟁 문화가 만들어 낸 시기와 질투의 결과물입니다.

과도한 경쟁이 있는 한 승자와 패자는 현격히 나누어지고, 루저는 사회 암울한 구석 곳곳에서 자신을 초라하게 내몰은 세상과 그 안에서 히히덕거리며 승자의 축배를 드는 자들에 대해 세상을 증오하며 어둠 속에서 킬킬거리는 조커(Joker)가 됩니다.

이 조커들은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가면으로 분장한 광대처럼 세상을 조롱하고 군중들을 선동하여 자신의 존재감을 묵살시킨 승자들을 향해 조소를 쏟아붓습니다. 그리고 때로 죽여버립니다.

왜 제도적 틀로서 안 된다는 것입니까? 사회 문화가 온통 경쟁을 부추기고, 즐겁고 신나야 할 음악 세계마저 치열한 경쟁으로 숨이 막힐 지경의 사회(연예) 현실에서는 어느 누구도 제대로 살아남기 힘듭니다. 특히 나이도 어린 사람들에게 그 헛된 야망은 결국 허망한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발 이제 그놈의 노래 자랑대회 좀 그만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좀 그칠 때가 됐습니다. 노래 자랑대회를 해도 그것이 지나친 경쟁으로 과열되어 서로를 적으로 만드는 것들이 아니라 아주 건전하게 사회문화를 선도할 수 있는 그래서 음악이 좋고 노래가 즐거워 서로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줄 수 있는 무대로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사회풍토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일 역시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세상 문화에 휩쓸리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런 세상 풍조 속에서 세상의 이런 사람들과 섞이지 않기 위해 사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세상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니 어찌해야겠습니까? 배가 물 위에 떠있되 그 물이 배 안으로 스며들어와 배를 침몰시키지 못하도록 잘 막으며 떠 있어야 하는 것처럼, 세상 안에 있되(in the world) 세상에 속하지는(of the world)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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