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화인시니어펀드에서 주최한 글짓기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김정일 님
제1회 화인시니어펀드에서 주최한 글짓기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김정일 님

[고양일보] 아래의 ’나의 어머니‘는 제1회 화인시니어펀드에서 주최한 글짓기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김정일 님의 작품이다. 참고로 화인시니어펀드는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의 이태원 소장이 돌아가신 어머니의 뜻을 기리고자 출연한 기금으로 설립되었다.

나에게 어머니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칠 남매를 키우셨는데 유난히 나를 사랑해 주셨다. 그것은 내가 어릴 때 건강이 좋지 않아서였는지 모르지만, 내가 어릴 때는 아버지의 사업이 번창하여서 부러움 없이 잘 살았지만, 중학교에 입학해서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친구의 사업을 도와주기 위해 대성리로 이사를 갔다. 차비를 아끼느라 이 십리 길을 걸어서 학교에 갔다 오면 배가 고파서 참기 힘들었다. 어머니는 여름에는 감자, 겨울에는 고구마를 쪄 주셨다. 꿀 맛을 그 맛에 비 할 수 있으랴! 동생들도 먹어야 하는데 배가 고프다고 내가 먼저 먹고 했으니 참 철도 없었다.

내가 살던 대성리 앞은 남한강이 흐르고 있었다. 휴일에는 어머니와 강가에 가서 다슬기를 잡아서 시장에 가 팔아 새 도시락을 사서 어머니가 잡곡밥을 싸서 주실 때 얼마나 기뻤는지! 새 도시락은 노란색으로 반들반들 윤이 났다.

한 번은 동생들이 홍역을 하는데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애처로웠다. 칭얼대면서 과자를 사 달라고 조르는 동생들을 돈이 없어서 못 사주는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서글펐을까!

중2 겨울에 아버지가 바라시던 사업이 허가를 취득하여 우리 집안의 가운이 피기 시작한다. 아버지가 양조장 허가증을 취득해서 집에 오셔서 어머니에게 보여 드릴 때 기뻐 하시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다시 사업을 하시기 위해 백령도로 가족이 이사를 했다. 나도 백령 중학교로 전학을 해서 졸업을 하게 됐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부터 아버지가 하시는 사업이 번창해서 우리는 갑부 못지 않게 잘 살았다. 고생만 하시던 어머니도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도 어머니는 식사에서 부터 옷까지 세심한 배려를 하면서 나에 대한 애정 표현을 하셨다.

어머니의 나에 대한 사랑은 동생이 먼저 세상을 떠난 후에 더해지신 것 같았다.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지역에서 방위 생활을 할 때에도 훈련을 받는 나의 모습을 집에서 바라보면서 걱정을 하셨다. 나는 우리 나라의 최북단인 백령도에서 훈련을 받고 방위 생활을 했기 때문에 어머니가 멀리서나마 내가 훈련 받는 모습을 보실 수 있었다. 훈련 교관은 우리들이 구보를 할 때 어머니를 보면 ‘어머니! 아들 잘 먹이세요!“ 하며 뛰어가곤 했다.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나에게 어머니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고기 반찬과 맛있는 음식들을 준비해 주시곤 하셨다. 훈련 받는 내가 옷을 입고, 물에 들어가는 기합을 받는 것을 보셨을 때에는 눈물이 났다고도 하셨다.

3주간의 훈련이 끝나고, 퇴소식에 아버지, 어머니가 오셨는데, 내가 1등으로 수료를 해서 사령관의 상을 받을 때 아버지, 어머니가 기뻐하신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나의 어머니는 노래를 부르시는 것을 좋아 하셨는데, 내가 어머님을 닮아 노래를 잘 했다. 특히, 오기택이 부른 ”고향 무정“을 부르면 손뼉을 치면서 쫓아 하시고, 흥이 난 나는 ”충청도 아줌마“ 까지 부르면서 어머니와 노래에 대한 교감을 할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 사업을 함께 도우며, 어머니와 같이 살았다. 장사가 잘 되어 서울에 올라오지 않고, 백령도에서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좋은 일만 일어나지는 않았다. 남동생이 교통 사고로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날 줄을 생각했으랴! 그 때 어머니의 비통함은 지금도 나의 기억에 생생하다.

동생은 중학교 1학년이었다. 공부도 잘 해서 반에서 실장을 하고 있었다. 특히 과학을 좋아해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조립하기 좋아하고, 우표 수집이 취미라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내가 동생에게 우표를 사보내고 했다. 동생이 죽은 후 우표첩을 지금도 내가 보관을 하고 있다. 유난히 똑똑하고 예쁜 동생이었기에 나는 너무 가슴이 아파 한 동안은 모든 것이 다 싫고, 살기도 싫었다. 어머니는 억장이 무너지셨고, 자리에 누우셔서 동생의 이름을 부르면서 울기만 하셨다. 우리들을 너무 사랑하셨던 어머니는 그 때의 충격으로 일평생을 병마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나셨다. 동생이 사고를 당하자 어머니는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심장이 약하신 어머니는 그 때부터 병원을 다니시며 약을 복용하기 시작하셨다. 백령도에서 한참 사업이 번창 했으나, 형님이 사업 자금을 수 십 번 조달 받으면서, 가세는 다시 기울기 시작했다. 세상 물정이 어둡고, 남을 잘 믿는 형님 때문에 그 많던 재산도 서서히 모래성이 무너지듯 없어지고, 결국엔 내 고향 백령도를 등지고, 떠날 수 밖에 없었다. 항상 자식들이 잘 되길 바라시는 부모님의 슬픈 얼굴은 아직도 생생하게 내 기억에 남아 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사업을 접은 후, 부천으로 나와 나도 서울로 첫 직장 생활을 시작 하였고, 다시 인천으로 이사를 와서 한 참 후에 결국 어머니는 치매에 걸리셨다.

한 번은 직장에서 돌아온 나를 보시더니 어머니의 지갑을 내가 훔쳐 갔다고 하시는 것이였다. 당신이 그렇게 사랑하시던 아들을 도둑으로 몰고 존댓말을 쓰면서 횡설수설 하는 어머니를 보니 너무나 난감하고 무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치매에 걸리신 어머니에 대한 아내의 보살핌은 지극 정성이었다. 더불어 우리 집 근처에 사시는 큰 누님께서는 아내가 직장을 나간 낮 시간에 집에 와서 부모님을 보살피셨고, 하루종일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 온 아내는 집에 와 부모님 특히, 치매를 걸리신 어머님, 그리고 세 딸들을 포함한 대가족 살림까지 1인 다역을 한 번도 불평 없이 해냈다. 지금도 아직 아니, 평생을 고맙게 생각해야 된다고 되뇌였다. 그렇게 나를 사랑하셨던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신 후로 나를 거의 알아 보지 못 하시고, 가끔씩 내 이름을 부르곤 하셨다. 새벽마다 동네가 떠나가라 이름을 부르시던 어머니, 내일 직장을 또 나가야 하는 생각에 단지 힘들다는 생각만 하고, 내가 지금도 후회하는 건 어머니를 잘 대해 드리지 못 하고, 귀찮은 존재로 생각했나 하는 것이다. 가끔씩 정신이 돌아와 나를 알아보는 어머님이 안쓰럽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하였다. 지금도 되돌아 보면, 우리가 백령도에서 게속 살았다면 어머니께서도 치매에 걸리시진 않으셨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버지는 정신은 똑똑 하시니, 한숨만 쉬시면서 애를 태우시다 1996년에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삼 년이 지난 1999년에 돌아가셨다. 망각이 없다면 어찌 사람이 슬픈 일을 당하고 살 수 있으랴마는 레테의 강을 건너면 모든 것을 잊게 되는가 보다.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이 십여년이 지났지만, 나는 지금도 내가 할아버지가 된 지금도 부모님에게 불효만 저지르고 효를 못 한 것이 후회가 된다. 대중 가요의 가사에도 있듯이 ”있을 때 잘 해.“라는 가사 구절이 떠오른다. 부모님은 우리를 기다려 주시지만, 자식이 장성하여 부모님께 효도를 하려고 할 땐 부모님은 정작 그 때는 기다려 주시지 못 한 다는 것을 내가 70세가 되어서야 느끼는 것이다. 부모님이 우리에게 잘해주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정말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잘하라고 모든 사람에게 얘기하고 싶다.

”어머니, 아버지 사랑합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부모님과 죽은 동생을 위해 이 시를 바치고 싶다.

<내 고향 백령도>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간 그 곳에

그리던 고향이 있었다.

옛날의 모습은 간 곳이 없고,

희미한 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분도야!

미안하다 외롭고

쓸쓸한 망산에

너를 두고 살기 바쁘다고

너를 만나러 오지 못 했구나

두무진 포구에서

유적재건위원회 회장

김순호 아버지의

이름을 보았을 때

가슴에 치밀어

오는 불덩이

숨을 쉴 수 없었다

인생은 나그네길

아버지 어머니!

저도 부모님을 만나 뵐 날이

가까워 지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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