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고양파주] 보라는 70일이 지나면서 ‘Tummy time’(아기의 상체에 힘을 길러주기 위해 엎어놓는 자세)을 시작했다. 초점책자(눈의 초점을 잘 맞추고 명암을 구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유아용품)를 잠깐씩 보기도 하면서 팔꿈치 힘으로 머리를 들어 버틸 줄도 알게 됐다.

보라의 70일과 첫 부활절
보라의 70일과 첫 부활절

딸과 사위는 보라가 처음 맞이하는 부활절을 준비했다. 달걀을 삶아 색연필로 색칠해 가면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둘이서 준비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소소한 행복을 느꼈다.

외부에서의 첫 모유수유와 쑥캐던 날
외부에서의 첫 모유수유와 쑥캐던 날

뉴저지에 완연한 봄이 왔다. 작년 봄에는 공원에서 땅을 뚫고 자라난 쑥을 캐다가 쑥개떡과 쑥버무리를 해서 먹었다. 올해는 세 모녀가 함께 공원으로 나가 쑥을 캐어왔다. 다음날 보라를 보려고 방문한 딸의 친구에게 잡채와 쑥버무리를 만들어줬는데 맛있다면서 잘 먹어주는 모습이 고마웠다. 딸이 어릴 적에 전주에 잠시 살면서 봄이면 지천에 널린 쑥을 캐와 쑥개떡을 만들어 먹었던 맛을 기억하는지 딸은 쑥개떡, 쑥버무리, 쑥국을 너무나 좋아한다. 한 번 더 쑥을 캐서 냉동실에 좀 얼려두고 떠나기 전에 몇 번 더 해줘야겠다.

딸의 회사인 헨릭슨 방문과 첫 개장한 mother's room
딸의 회사인 헨릭슨 방문과 첫 개장한 mother's room

4월의 마지막 월요일에 딸은 정식 출근에 앞서 보라, 나와 함께 사무실에 들렀다. 버스를 타고 오전 11시경 ‘Port Authority Bus Terminal’에 도착해 파리바게트에서 케익을 사서 딸의 회사인 Henricken으로 찾아갔다. 도미닉 지사장, 키이스 영업팀장, 딸과 같은 디자인 팀인 애슐리, 제키 등을 만났다. 이들 직원들은 딸과 77일째인 보라를 반갑고 따뜻하게 환영해 주었다. 특히 옆자리 친구 애슐리는 딸보다 먼저 임신했었는데, 그만 유산이 되어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들었다. 그렇지만 딸이 임신한 이후 애슐리 또한 곧 임신을 해 다음달 6월 12일 출산을 앞두고 있다. 보라는 아마 뱃속에서 아빠의 목소리보다 애슐리의 목소리를 더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애슐리의 목소리에 보라는 한껏 웃어주었다. 그런 보라의 웃음에 애슐리는 너무 행복해 했다.

우리 풍토에서는 아가에게 가끔 ‘강아지’라고 호칭하는데 이곳 미국에선 아가에게 pumpkin(호박)이라는 애칭이 상용된다. 사무실 동료들이 애칭을 부르며 한번씩 안아주면 보라는 방긋방긋 살인미소를 짓는다. 모두들 보라를 보더니 정말 인형 같다면서 환호를 질렀다.

회사는 딸이 출근해서 모유를 미리 빼내어 저장해둘 수 있도록 ‘Mother's Room’을 새로 마련해주었다. 딸이 필요한 부분을 완벽하게 준비해 준 도미닉 지사장이 고마웠다. 이 아늑한 방에서 보라는 엄마 품에 안겨 첫 수유를 마쳤다.

‘Vessel’ 전망대와 ‘뉴욕 엣지(New York Edge)’
‘Vessel’ 전망대와 ‘뉴욕 엣지(New York Edge)’

우리는 사무실에서 나와 뉴욕 맨해튼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는 ‘Vessel’ 전망대까지 운동 삼아 천천히 걸었다. ‘Vessel’ 전망대는 ‘HUDSON YARDS’의 영국 디자이너 토마스 헤더윅의 작품인데, 2억달러의 공사비로 2500여 계단이 연결되어 있는 벌집모양의 전망대다. 이 전망대는 지난 3월 15일에 처음 공개됐다,

하지만 입장을 위해 1시간 40분을 기다려야 했기에 이날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5월 중순 전에 온라인으로 예약해서 일찍 나와 보라와 함께 2500개의 계단을 꼭 올라가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34번가에서 42번가 브로드웨이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또 다른 명소인 지상 100층 높이(367m)에 설치된 전망대인 ‘뉴욕 엣지(New York Edge)’를 보았다. 이 전망대는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높은 전망대다. 건물 꼭대기는 삼각형이고 돌출 바닥 일부가 강화유리로 만들어져 발밑으로 맨해튼 시내를 볼 수 있다. 이곳은 올해 말에 개장 예정이라 다음 방문 때 모두 같이 가볼 수 있을 것 같다.

2010년과 2019년의 타임스퀘어
2010년과 2019년의 타임스퀘어

여전히 타임스퀘어에는 많은 관광 인파로 가득했다. 도로 양옆의 수많은 선전광고 전광판 중 이달에 개봉한 영화 ‘어벤져스’ 광고가 눈에 띄었다. 작년에 보았던 웨이츄레스 뮤지컬 공연 간판도 여전히 걸려 있었다. 광장의 한복판 빨간 계단에는 오늘도 사람들이 삼삼오오 앉아서 뉴욕 한복판의 노란 택시들과 타임볼 건물, 어마어마한 광고판을 구경하고 있었다. 퇴근시간이 되면 맨해튼 42번가는 저 많은 빌딩 사무실에서 퇴근해 집으로 돌아가는 직장인들로 꽉 찬다. 이곳을 빠져나와 우리는 서둘러 터미널로 가서 버스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잠깐, 4~5년 전 이야기를 해야겠다. 2015년 남편은 딸과 함께 하와이에서 여름휴가를 같이 보내기로 했다. 남편은 하와이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요로결석과 통풍의 초기 증상이 발생했다. 아픔을 참으며 힘겨운 첫날을 보낼 때 호텔로비 직원인 레스터씨의 도움으로 약을 구할 수 있었다.

다음날 병원 진료 후에 레스터씨는 약국까지 함께 동행해 투약 받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날 오후 마우이섬으로 가는 일정에도 우리의 무거운 짐까지 맡아주시겠다며 우리를 공항까지 데려다 주었다. 마우이섬으로 출발하려는데 레스터씨는 발이 아파 운전이 힘들테니 당신의 마일리지로 할레이칼라까지 운전을 해주고 싶다는 제안을 했다.

우리는 갑작스러운 제안에 잠시 고민하다가 베풀어 주시는 친절을 거부하기 보다는 이것도 인연이라 생각해 이틀 후 아침 첫 비행기로 도착한 레스터씨와 마우이공항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이틀 후 아침, 작은 바구니에 애플망고를 들고 온 레스터씨를 만나 3055m 높이의 산인 ‘할레아칼라(Haleakala)’를 운전해 올라갔다. 이곳 저곳을 관광하고 다시 본섬으로 돌아와 마지막 밤 투숙할 호텔까지 왔다. 다음날에는 레스터씨는 호놀룰루 공항까지 배웅해 주었다. 내년에 꼭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찾아오겠노라 말했는데, 다음해인 2016년 여름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레스터씨를 만나러 왔다.

이렇듯 레스터씨에게 친절을 베푸신 이유를 여쭈어 보니 내 딸이 전달했던 초코렛 한 개에 너무 고마웠다는 것이다. 8년 만에 만난 아빠의 고통에 전전긍긍하던 딸이 안쓰럽고 사랑스러워 그렇게 해주고 싶었던 거라고 말해주었다.

결혼을 승락했던 만남과 레스터씨와의 재회
결혼을 승락했던 만남과 레스터씨와의 재회

1년 만에 다시 만난 레스터씨는 투잡을 했기 때문에 힘이 들었던지 많이 야위어 있었다. 우리는 선물로 준비해간 홍삼액을 전달했다. 여행 중 아플 때 현지인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우리는 행운이었고, 나중에 레스터씨가 퇴직하면 꼭 제주도로 같이 여행을 하며 신세졌던 모든 걸 갚을 계획을 하고 있다. 지금도 레스터씨와 계속 연락하면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딸은 남자친구와는 그동안 보이스톡과 페이스톡으로 소통했다. 딸이 사위와 함께 하와이로 오겠다고 해서 우리는 2년여의 만남을 이어가고 있기에 방문을 허락했다. 우리 부부와 동서, 조카 둘과 함께 인천공항에서 출발했고 아이들은 뉴욕에서 떠나 하루 전 도착해 호룰룰루 공항으로 렌트한 차를 가지고 마중 나왔다. 남자친구를 아버지에게 첫 인사를 시켜 주고, 우리는 함께 5박 6일간의 여행 동안 많은 얘기를 나누며 7명이 모두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마지막 날 아침. 나는 아침을 준비하고 있는데 갑자기 빨간 케이스 하나를 보여주면서 “어머니 이번 여행 중에 가족들 앞에서 프로포즈 하려했는데 도저히 준비할 틈이 없어 뉴욕 돌아가서 프로포즈할께요. 허락해 주시겠어요?”하면서 웨딩반지를 꺼내 보여주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만나서 사는 것은 정말 중요한 것이 배려하고 서로 지금까지 살아온 환경이 다르기에 각기 개성 있는 성격을 잘 맞추며 사는 것 같아. 잘 살 수 있겠어?” 했더니 “잘하고 있고, 서로 맞추어 가려고 노력하면서 만나고 있으니 꼭 결혼할 수 있게 허락해 주세요”라고 했다.

느닷없는 결혼 허락 요청에 당황해 나는 샤워중인 남편을 어서 나오라고 했다. 사위는 옷도 제대로 입지 않은 남편에게 딸 모르게 얼른 반지를 보여준 후 결혼할 수 있게 해달라고 허락을 요청했다. 남편도 오래 잘 만나고 있는 것을 알기에 “서로 성격 잘 맞추면서 잘 배려하고, 이제는 성인들이니 둘의 결정을 존중할게”라면서 허락을 해 주었다.

딸은 우리 셋이 하와이에서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을 프로포즈 받던 날 알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는 하와이에서 자기네 둘이서 빨강이, 파랑이로 애칭을 부르며 지내던 딸의 결혼을 승낙했었다.

다음 편엔 보라 아빠의 치과병원, 보라 이모와 이모부 회사 방문 등 맨해튼을 휘저으며 강행군 했었던 이야기와 80일을 무사히 보낸 보라 이야기를 적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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