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권희 팝피아니스트
이권희 팝피아니스트

[미디어고양파주] 미디어고양파주(MGP)가 매주 목요일 ‘팝피아니스트 이권희의 인생콘서트’라는 연재를 해오고 있습니다. 고양시 식사동에 거주하며 풍동의 음악작업실로 오가는 이권희씨는 고양시의 오랜 이웃입니다. 6장의 독집음반을 낸 팝피아니스트이지만 솔로로 활동하기 이전부터 지금까지 록밴드인 ‘사랑과평화’에서 키보디스트로 활동하며 음악활동을 넓혀오고 있습니다. 이제 그의 어린시절부터 시작되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제8화 운동화와 캠프 

지금 남아있는 내 어린 시절의 흔적이라고는 소풍날에 찍은 단체 사진과 학교 졸업사진뿐이다. 사진속의 촌스러운 내 모습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검정 고무신이다. 그 시절에는 평소에 늘 검정고무신으로 생활했고, 운동화는 소풍이나 명절 때만  신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 

그래서 아주 드물게 운동화를 사러 가기 전날 밤은 설레어서 밤잠을 설쳤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아궁이에 불을 때는 아버지 옆에 앉아서 부지깽이로 박자를 맞추며 콧노래를 부르면 아버지께서는 “우리 희야가 엄마하고 오늘 장에 간다고 기분이 좋은 갑네. 허허허!”라며 웃으셨다. 

“예, 오늘 운동화 사준다고 했니더!”  “그래? 좋겠네”라고 하신다 
그러면 나는 “이번에는 내발에 맞는 신발을 사면 좋겠는데요” 
아버지는 “와? 큰 게 싫터노?” 
나는 “예~ 너무 큰 거를 신으니까 빨리 뛰지도 못하고… 또… 부끄러버서요” 
아버지는 “그래도 쪼매 더 낙낙한 거를 사야 내년 까지 신을 수가  안 있겠나. 발이 빨리 커서 그렇다 아이가” 온갖 얘기로 나를 달랬다. 

엄마와 장에 나설 때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희야, 오늘 맛있는 것 마이 묵고 오너래이” 
“예, 오늘은  운동화도 살깁니다!”라고 하면 
“우와! 운동화까지. 권희는 오늘 기분 댓길이겠구마” 
“네, 갔다 오겠십니더”하고 엄마보다 앞장서서 뛰어가곤 했다. 

엄마는 곡물을 가득 담은 보따리를  머리위에 이고는 손도 안대고  묘기 부리듯 신기하게도 잘 걸었다. 시내 장터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엄마는 곡물을 현금과 교환하셨다. 아직도 시골에 가면 그렇지만 옛날 분들은 현금이 없었다. 그래서 농사지은 농산물을 시장에 가지고 나가 도매상에게 넘기고 돈을 만들었다. 

드디어 신발가게에 들어서면 내 설레임에 화답하듯 신발 특유의 고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이 나이에도 아직 새 신발에서 풍기는 고무 냄새에 설레인다. 내가 마음에 드는 신발을 고른 뒤  “엄마! 나 이거…” 하면 엄마는 “그래? 알았다! 아지매, 이 신발 좀 큼지막한 거 내놔보소”라고 말했다. 순간 내 마음에는 ‘헉!’하는 놀라움과 실망이 교차했다.

“엄마아… 이제는 큰 신발은 신기 싫다 말이다!” 
“이노무 짜석아, 큰 걸 사야 내년 까지 신을 수가 있다 말이다” 
“안 신어, 안 신어. 절대 안 신는다고” 
“까불지 말고 그냥 신어라. 너 그러다 아부지한테 맞는다” 

엄마의 최고 무기는 ‘아버지로부터 내가 혼날 수 있다’는 으름장이었다. 난 아버지가 화가 나면 얼마나 무서운 분인 줄 알기 때문에 하루 종일의 설렘이 사그라져서 실망하고 기분이 상했다. 나는 엄마의 협박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기죽어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나와 엄마는 ‘흥정 전쟁’을 벌였다.

엄마는 “희야, 신발 쪼매 큰 거로 하자. 그라믄 맛있는 거 사주께. 머 묵고 싶노? 짜장면 사주까? 과자 사주까?”라고 말했다. 나는 또 맛 나는 걸 먹을 생각에 슬그머니 화가 풀어져서“알았다”하며 못이기는 척했다.

그런데 본격적인 흥정 전쟁은 엄마와 주인아주머니 사이에 벌어졌다. 엄마는 주인아주머니에게 신발 가격을 반값으로 뚝 잘라서 일방적으로 들이댔다. 하지만 주인아주머니는 어이가 없는 얼굴로 “와이카노? 마 절대로 안되니더” 
“아따 마 깎아주면 되겠구마”  
“아이구 아지매. 이만 하면 마이 깎는 기지. 그만 좀 하소” 
“아이고 그럼 못 사것다. 희야, 그냥 고마 집에 가자”하며  주인아주머니에게 흥정을 위한 비장의 카드를 날리는 줄도 모르고  눈치 없이 나는 “뭐? 엄마 난 안사주면 집에 안 갈끼다”하고 고집을 부렸다. 그러면 엄마는 한쪽 눈을 껌벅 그린다. 그러면 난 엄마의 작전인줄 알고 조용해진다.  그러는 사이 주인아주머니는 “아따, 별난 아지매도 다 있네 그냥 마 가져가소”한다. 

삽화 = 이영은(zzari)
삽화 = 이영은(zzari)

그러면 엄마는 얼른 신을 장바구니에 담고  항상 들리는 시장 식당으로 나를 데려가 맛있는 우동을 사주고 시장을 본 후  집으로 오곤 했다. 집에 와서 운동화를 신어보면 얼마나 큰지 엄마께서 안쪽에 못 쓰는 신문지를 빡빡하게 밀어 넣고 신발에 발을 맞춘다. 신발을 신고 아버지께 보여드리려고 걸어가면 아버지는 “아이구 우리 희야 멋지네!”라며 응했다. 내가 “아부지 너무 커요”라고 말하자 “괜찮다 보기 좋다” 하며 아버지는 나를 달래려고 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명절날 신발을 신은 다음날이면 엄마께서는 운동화 안에 습기방지를 위해 신문지로 꽉 채운 뒤 높은 곳에 보관했다. “엄마. 쪼메만 더 신으면 안돼나?” 나는 아쉬워서 말했다.  “안 된다. 아낐다가 이담에 어디 갈 때 가람(외출용)으로 신어야 된다”라는 엄마의 말에 나는 엄마를 원망하기도 했다. 

6학년 어느 날 명절날 외에도 운동화를 맘껏 신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됐다. 학교에서 보이 스카우트 단원을 모집하는데 보이스카우트의 정신과 활동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는데 내 마음은 그런 것보다는 보이스카우트 복장과 신발에 온통 쏠렸다. 복장과 운동화가 너무 멋있게 보였던 것이다. 모자와 제복, 허리 옆에 차고 다니는 온갖 장비, 윗도리에 부착된 훈장 같은 마크를 보며 나는 부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저 멋진 것을 걸친다면 용감한 군인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설레임을 못참고  저녁에 엄마, 아버지에게 말했다.

“엄마. 학교에 보이스카우트라고 있는데 나 그거 하면 안되나?”라고 묻자 
엄마 왈 “뭐? 보이소…뭐라?” 
“아이참! 엄마는 와그리 무식하노! 어쨌든 간에 나 그거 할끼다” 
“이 노무 손아 그기 머하는 긴데?” 
“ 으응… 그기 머냐하면… 진짜로 멋있는 옷 입고… 단체로 모이서 여러 가지 배운다네…” 
“ 마 시끄럽다! 저녁 때 너거 아부지 오시면 말해봐라.”
“아이 엄마가 말해” 

저녁에 아버지께서 들어 오셨다  엄마가 “보소. 희야가 학교서 머 한다카는데. 머하는지 모르겠지만… 자꾸 하게 해달라 카는데 우짜끼요?”  
“그게 머~꼬?” 

그때 아마 내 기억으로는 바로 위의 누나가 아버지한테 설득해서 허락을 받은 것 같다. 이튿날 보이스카우트에 가입하고 회비와 제복 값을 내고 옷을 받아 집에 와서 입어보았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보니 얼마나  멋있는지, 그 제복을 입고 학교 등교할 모습을 상상하니 그날 밤에 잠이 오질 않았다.  

아침에  모자도 쓰고 흰 장갑까지 끼고 풀 버전 복장으로 마당에 나서는데 내가 사관생도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얼마나 기분이 우쭐해지는지 스스로가 자랑스러울 정도였다.

삽화 = 이영은(zzari)
삽화 = 이영은(zzari)

 학교운동장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애들의 시선은 전부 나의 복장으로 집중했다. 다들 “우와”, “저거 무슨 옷이고?”, “군복 같다” 등의 각자의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때 보이스카우트는 전교에서 20여명 미만이었는데, 내가 보이스카우트 도반장을 맡았다.

 보이스카우트의 선서구호는 이랬다. “나는 나의 명예를 걸고 다음과 같은 조목을 굳게 지키겠습니다. ‘믿충도우예친순쾌근용순경’이라는 12가지 수칙의 앞머리글자를 힌트로 해서 구호를 다 외우기도 했다. 보이스카우트가 되어서 은근히 남을 의식 하게 되어 불편한 감도 있었지만 자랑스러움도 컸다. 

여름 방학 때 보이스카우트 연맹에서 주최하는 엄청난 규모의 야영대회가 공설 운동장 숲에서 열리게 됐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야영장 캠프 경험과 텐트 생활을 해보게 됐다. 각 학교 별로 보이스카우트 회원들이 다모이니 엄청나게 많은 학생들과 인솔 선생님, 도우미로 같이 온 엄마들이 함께 생활했다. 한여름 공설 운동장 숲속에서  일주일간의 페스티벌을 했는데 그 경험이 내 평생 머리에 지워지지 않는 추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우리학교에서는 지원자가 많지 않아 10명 미만이 참가했다. 늘 깡촌 시골에서 생활하다가 도시 사람들의 공간에 들어가니 너무 설레었다. 여러 군상의 사람들을 구경하고 맛있는 군것질 하는 게 꼭 환상의 세계로 들어온 것 같았다. 

보이스카우트 연맹에서 주최한 일주일간의 프로그램은 참으로 다양했다. 다채로운 악기연주도 듣고, 시내 학교에서  각각 준비한 장기자랑과 연극도 보았고, 마술쇼도 처음 구경했다. 이 밖에 남녀혼합 합창곡 무대, 고적대 퍼레이드 행사도 벌어졌다.  

마술 쇼 중 인상 깊게 남은 장면이 있었다. 어떤 물건을 요술 상자 같은 기계에 넣으면 그 물건이 자라서 크게 되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 상자 안에 여러 가지의 물건을 넣으면 모든 것이 완성되어서 나오기도 하고, 어린 식물을 넣으면 다 자라서 바깥으로 튀어 나오는 것이었다. 마지막에 부분에 그 마법사 아저씨가 아기 인형을 집어넣으면서  “자! 여러분. 이 인형이 들어가면 인형이 어떻게 자라서 나올지 궁금하시죠?”라며 관심을 끌었다. 우리들은 “와! 대빵 큰 인형이 나올낀가?”하면서 기대감을 가지고 잔뜩 긴장하면서 물건이 나오는 쪽으로 집중하고 있었다.  

“자! 여러분. 아주 멋지고 잘생긴 커다란 인형이 나올 겁니다. 인형을 누구에게 드릴까요? 이번 야영대회에서 제일 우수했던 대원에게 이 상품을 드립니다!” 하기에 “와아! 대빵 큰 인형 상품으로 받으면 진짜로 좋겠다 그자?”라고 하면서 서로 기대에 찬 얼굴로 쳐다보았다. 

“여러분! 다 같이 수를 셉시다!” 
“하나… 두울…세엣…”  동시에 다 같이 함성으로 외치니 음악소리와 함께 튕겨 나온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바로 팬티만 입은 남자 아저씨였다. 

우린 순간 깔깔 대고 웃으면 함성을 질러댔다. 그런데 그 아저씨가 우리 가까이 걸어오는 모습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이 아닌가. 바로 우리학교 인솔교사로 오신  담임선생님이었다. 덕분에 그날 최고 대원들은 바로 우리 학교 학생이었다. 왜냐하면 그 큰 인형이 우리 선생님이었으니까. 

삽화 = 이영은(zzari)
삽화 = 이영은(zzari)

마지막 날 밤 하이라이트인 캠프파이어도 처음 보게 되었다. 마을에서 밤에 불을 자주 피워 봤지만, 그날의 캠프파이어는  질적으로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멋있고 운치 있는 불이었다. 모두들 둘러앉아서 건전가요를 부르며 한주간의 일정을 되돌아보았다. 이 경험으로 여러 가지 추억을 가슴에 담을 수 있었다.  

아쉬운 마지막 행사가 끝나고 이튿날 학교 운동장에 집결해서 해단식을 끝냈다. 집으로 걸어오는 도중  지친 탓인지 기운이 없었다.  집에 도착해서는 일주일간 같이 지냈던 동료들과의 이별에서 오는 서운함을 이기지 못했다. 얼마나 서운했던지 헤어져서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리움이 밀려왔고 그래서 방에서 홀로 엄청 울었다. 

저녁에 엄마 아버지께서 들어와서 “우리 희야, 재밌게 놀다 왔나?”라고 물었다. 나는 답은 못하고 엄마 품에 안겨 그냥 울기만 했었다 

“우리 희야. 아이들과 헤어지니 마이 섭섭했는갑네…”                                           

“괜찮다… 며칠 지나면… 괜찮아 질끼다…”하면서 내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저작권자 © 고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