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권희 팝피아니스트
이권희 팝피아니스트

[미디어고양파주] 미디어고양파주(MGP)가 매주 목요일 ‘팝피아니스트 이권희의 인생콘서트’라는 연재를 해오고 있습니다. 고양시 식사동에 거주하며 풍동의 음악작업실로 오가는 이권희씨는 고양시의 오랜 이웃입니다. 6장의 독집음반을 낸 팝피아니스트이지만 솔로로 활동하기 이전부터 지금까지 록밴드인 ‘사랑과평화’에서 키보디스트로 활동하며 음악활동을 넓혀오고 있습니다. 이제 그의 어린시절부터 시작되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제5화 개구리와 썰매타기

마을 가운데 있는 당수나무 옆으로 넓은 논이 있었다. 그 논에는 유난히 개구리가 많았던 기억이 난다. 봄이 되면 아무리 어린애라도 올챙이 알을 건져내어 손바닥에 담아서 놀 수도 있을 만큼 많았다. 또 올챙이에서 개구리로 자라게 되면 온 동네 길바닥은 개구리들이 가득 차 온통 길에는 ‘개구리 세상’이 되곤 했다. 

이맘때는 정해진 짧은 시간에 누가 큰개구리를 많이 잡는지 시합이 벌어지기도 했다. 온 마을로 개구리 사냥을 하러 다니려면 필수품이 있었는데, 그것은 나뭇가지였다. 특히 가늘고 가지가 많은 것이 개구리 잡는데 유리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개구리를 후려치면 그 자리에서 쫙 뻗어버려 쉽게 잡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허리춤에는 잡은 개구리를 보릿대에 굴비 엮듯이 엮어서 전리품처럼 자랑스럽게 달고 다녔다. 

때론 두꺼비를 능가할 정도로 큰개구리를 잡을 때도 있었는데 직접 구워 먹기도 했다. 가까운 집 아무데나 들어가도 어느 집이나 장독대엔 왕소금 단지가 있었으므로 “소금 쪼매만 가져가니더~”하며 소리치고 소금을 가져왔다. 그리고 강으로 내려가 불을 피워 잘 구운 뒷다리를 왕소금에 찍어 먹었다. 쫄깃하고 고소한 것이 정말 별미였다.

삽화 = 이영은(zzari)
삽화 = 이영은(zzari)

어른들은 개구리를 몸보신으로 먹기도 했지만 농사일로 바빴기 때문에 일일이 개구리를 잡으러 다닐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해질 녘 우리들이 강가에서 개구리를 먹고 있을 때면 막걸리를 사와 슬쩍 옆에 끼어들면서 우리를 밀어 내고서는 우리가 잡은 개구리와 불을 차지하곤 했다.

유달리 보양식을 즐기는, 이웃 마을의 어떤 아저씨는 어두운 곳에서 애를 쓰고 잡은 것을 개구리로 착각하고 구워 드시고 그만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그 아저씨가 잡은 것은 큼지막한 두꺼비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개구리한테 미안한 생각이 많이 든다. 하지만 당시는 워낙 고기가 귀했을 때라 오로지 개구리 먹을 생각으로 봄이 오길 기다렸던 때도 있었다. 한창 자랄 때 단백질 보충에 개구리가 참 많은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 

또한 여름 방학이 되면  1인당 개구리 20마리 이상씩 잡아 말려서 학교에 과제물로 제출하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상한 과제물이었다. 그렇게 잡은 ‘과제물’은 갈아서 당시 학교의 축구부 선수들에게 보양식으로 먹였다는 풍문도 있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은 마치 공설 운동장처럼 축구장과 야구장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때는 축구공이 귀할 때라 지푸라기를 둥글게 압축해 말아서 축구공으로 삼았다. 그것마저도 없을 때는 그 물건이 굴러가기만 한다면 어떤 물건이든지 그 물건을 축구공 삼아 축구시합을 벌였다. 운동화는 또 어떤가. 운동화는 어려운 형편이라서 상상도 못하고 대부분이 고무신을 신고 있는 시절이었다. 고무신을 신고 뛰면 신발이 공중으로 벗겨져 공보다 더 멀리 날아가기도 했다. 그래서 고무신을 얇게 말은 새끼줄로 발등에 꽁꽁 동여매고 뛰었다.  

논바닥이 울퉁불퉁하고 벼 밑둥이 남아 있을 때는 넘어지면 온몸이 긁혀 상처투성이가 되지만 오로지 이기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뛰었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골인이 되는 것과 동시에 짚 묶음인 축구공이 풀려버리면 “골인이다”, “무효다”라는 것으로 실갱이를 벌였다. 그러면 유달리 잘 뛰던 애들은 승부 근성도 남달라 화가 나서 집으로 가버렸다. 그러면  나머지 애들은 흥미가 떨어져서 하나둘씩 흩어져 버리거나 다른 논에서 야구가 한창인 아이들에게로 옮겨가서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깔깔대며 놀기도 했다.

추운 겨울 정월 대보름이 가까워 오면 우리들은 미리 “야! 보름날 달 보러 갈래?”하고 약속을 잡았다. 보름날 저녁이 되면  윗마을부터 아랫마을까지 거의 모든 아이들이 삼삼오오 한손에 빈 깡통을 들고 들판에 모여들었다. 들판에선 빈 깡통에 구멍을 뚫고 단단한 줄로 손잡이를 만들어 불놀이할 준비를 단단히 했다. 일찍 온 아이가 모닥불을 피워 놓으면 아이들은 차례대로 불씨를 빈 깡통에 담고 그 위에 마른 나무를 조금 얹고  팔이 늘어질 정도로 깡통을 돌리면 연기와 함께 밑불이 살아났다. 

삽화 = 이영은(zzari)
삽화 = 이영은(zzari)

그리고 연기로 눈물을 흘려가면서 불씨를 키우려고 이 논 저 논을 팔을 돌리며 막 뛰어 다녔다. 하나둘씩 돌려대는 깡통의 불빛은  전기가 없는 깜깜한 시골마을을  환히 밝혀주었다.  붉은 불덩어리가 춤을 추는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 . 

밤늦게까지 우리들은 “달 봐라!”하고 외치면서  추운 겨울밤에 지칠 줄 모르고 뛰어 다니다 불씨가 다 꺼져 갈 때쯤엔 깡통을 공중으로 휙 던져 올렸다. 그러면 깡통에서 불씨가 쏟아지면서 화려한 불꽃놀이가 된다. 모두들 “와아!”하고 환호성을 지르지만 깡통을 잘못 던지면 바닥으로 내려 꽂히기도 했다. 더 심한 경우는  자기 머리위로 깡통을 던지는 바람에 불씨를 옴팡 뒤집어 쓴 뒤 데어서 동네가 떠나갈듯이 우는 아이들도 있었다.   

겨울방학 즈음이면 동네 가까운 논 주인이 일부러 빈 논에 물을 가두어서 얼음지치기를 하도록 배려 해주었다. 그때는 남쪽지방인데도 불구하고 왜 그리도 춥고 눈도 많이 왔었는지. 그 시절에는 스케이트는 구경 할 수도 없었고 일인용 썰매를 만들어 탔다. 

이 때 양손에 쥔 송곳 꽂힌 막대기는 잡고 균형과 가속을 내기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썰매 밑에는 대부분 굵은 철사를 붙임으로써 얼음에 마찰력을 줄여 속도를 내게 했다. 간혹 최고의 선망의 대상이 되곤 하는 ‘최첨단’ 썰매는 따로 있었다. 밑에 낡은 식칼을 양쪽에 뒤집어 박은 것이었다. 바닥에 꽂힌 식칼의 칼날 때문에 속도가 엄청 빨랐다. 우리 눈에는 그 ‘식칼 썰매’가 최고급 스포츠카로 보였다. 

아침 일찍부터  썰매를 종일 타다보면 얼음판에 수도 없이 넘어지기 마련이었다. 시합을 할 때 회전을 해야 하는 코스에서는 거의 균형을 못 잡고 넘어지는 게 일쑤였다. 지금처럼 방수가 되는 스키바지는 꿈도 못 꿀 때라 해가 지고  집에 갈 때면 엉덩이가 엄청 젖어 있었다. 그러면 엄마한테 혼날 것이 두려워 모닥불에 젖은 옷을 빨리 말리려고 불 가까이에 엉덩이를 들이대다가 바지를 태워버려 옷에 구멍이 숭숭 생기는 바람에 안 맞아도 되는 야단까지 갑절로 들어야만 했다. 

삽화 = 이영은(zzari)
삽화 = 이영은(zzari)

한 날은 집 앞 대문에서 겁이 나서 못 들어가고 서성이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지게에 짐을 가득 지고 오시면서 “우리 희야, 와! 안 들어가고 거기 서 있노?”라고 했다. 나는 “아부지~ 바지가 젖어서…” 하고 울먹이곤 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괜찮다, 들어가자”하면서 앞장서셨다. 아버지의 지게 뒤를 졸졸 따라 마당으로 들어가면  엄마께서는 나를 보지 못하시고 “희야는 와  아직 안 올까요? 배가 마이 고플 낀데”라고 말했다. 난 더 이상 숨을 수가 없어서 겁에 질린  얼굴로  “엄마!” 하고 살갑게 부르면 엄마는 내 꼴을 보고는 “이 노무 짜슥! 아침에 옷 새로 입혀 놨는 데, 또 옷 젖어서 오네!”라며  빗자루로 내 엉덩이를 불이 나게 때렸다. 난 맞다가 얼른 엄마를 뿌리 치고 대문 밖으로 도망가 버렸다. 

우리 집은 마을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집들 중 맨 뒷집이었다. 날이 어둑어둑 해지면 옛날부터 호랑이와 늑대들이 자주 내려온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에 무서워서 산 쪽으로는 도망가지 못했다. 젖은 바지에 체온은 자꾸 떨어지고 오들오들 떨면서 멀리도 못가고 대문에서 어슬렁거리면서 혹시 엄마가 날 데리러 나올까봐 집안을 기웃기웃 거렸다. 종일 썰매 타면서 힘을 다 소진 되었고  배는 고파오는데  엄마가 날 데리러 빨리 안 나오면 오히려 내가 짜증을 부리기도 했다.   

엄마는 밥상을 다 차려서 방에 들여 놓고 고무신 한 짝을 벗은 채 도망나간  막내아들을 찾으러 한손엔 고무신 한 짝을 들고서 찾으러 나오면  그 기척을 듣고 난 마치 대문 앞에는 안 왔던 척 얼른 뒷산으로 허겁지급 도망을 가서 숨어 있었다.  엄마는 늘 내가 잘 숨는 골짜기 계곡 안을 들여다 보며 “우리 희야 어디 있노?”하면서 이쪽저쪽 찾으시는 시늉을 했다. 밥 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래도 일찍 나타나기엔  자존심이 허락이 안 되었다. 엄마를 한참 숨죽여 지켜보다가 결국 엄마는 내가 숨어 있는 줄 알고도 “우리 희야가 여기에는 없구나!”하고 내려가는 척을 하면, 그제서야 나는 얼른 “나, 여기 있다 아이가!”하고 오히려 더 큰소리로 나타났다. 그러면 엄마는 “우리 희야 여기 있었네. 어디 있다 이제 나타났노?”하면서 내 손을 잡고 “배 많이 고프제? 다음부턴 옷 버리면 안 된데이”하면서 나를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엄마와 손잡고 집으로 들어서면 아버지께서 “희야 어디 갔더노? 얼른 밥 묵어라”라 하며 나를 반겨주었다. 

그 당시에는 전기가 없었고 수도시설도 없었다. 엄마는 한겨울에도 흐르는 시냇물에 맨손으로 그 많은 식구들의 옷을 일일이 손빨래로 했다. 또한 옷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한 번 입으면 적어도 2주 정도 입어야 하는 시절이었기에 하루 이틀 만에 빨래거리를 만들어 낸다는 건 엄마한텐 큰 고달픔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할머니가 되어버린 우리 엄마는 평생 화장품을 발라 보지도 못했다. 어려운 시대에 자식들을 위해 아낌없이 다 내어 주셨다. 갈라진 손마디를 보면 가슴이  짠해진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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