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고양파주] 미디어고양파주(MGP)가 매주 목요일 ‘팝피아니스트 이권희의 인생콘서트’라는 연재를 해오고 있습니다. 고양시 식사동에 거주하며 풍동의 음악작업실로 오가는 이권희씨는 고양시의 오랜 이웃입니다. 6장의 독집음반을 낸 팝피아니스트이지만 솔로로 활동하기 이전부터 지금까지 록밴드인 ‘사랑과평화’에서 키보디스트로 활동하며 음악활동을 넓혀오고 있습니다. 이제 그의 어린시절부터 시작되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3화-징검다리와 통기타 

이권희 음악칼럼니스트
이권희 음악칼럼니스트

 70년대 중반쯤 우리 마을은 정부에서 계획한 거대한 리조트와 큰 댐 공사로 인해 수용지역으로 묶였다. 우리마을에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농업중심에서 산업사회로 변화해 가는 시점에서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때였다. 다른 마을에는 전기도 들어오고 지붕과 도로의 모습들이 바뀌어져 가고 있었지만, 우리 동네는 리조트 계획에 고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10여 년간 공사 현장에서 살았다. 그때 그 현장이 지금은 골프장, 리조트, 놀이동산, 워터파크 등의 유락시설로 변했다. 바로 사계절 내내  관광객들이 제일 많이 붐비는 유원지 ‘경주보문 관광단지’로 변모한 것이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우리 마을 아이들의 놀이 풍경은 전형적이었다. 봄이 되면 보리밭에서 뛰어놀며 각종 식물 이파리로 풀피리를 만들어 불며 다녔고, 죄 없는 개구리를 잡으려고 온 동네를 찾아 헤매고 다니곤 했다.

당시에 학교와 마을로 오는 지름길이 하나 있었다. ‘햇볕  따뜻한 산길’이라는 뜻을 가진 ‘양산길’이라는 길이었다. 양산길로 갈 때면 산에 올라 진달래꽃을 한아름 꺾어서 입술이 보랏빛으로 물들도록 맛나게 먹기도 했다. 피곤할 때면 양지바른 무덤 곁에서 잠을 자기도 했던 기억도 있다. 요즘 사람들이 믿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무덤도 자연의 일부라고 여겼던 우리가 느꼈던 것은 무덤의 무서움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 무덤에서 참으로 따뜻하고 포근하다고 느꼈다.  

우리 마을에는 여름에는 비가 자주 왔다.  마을 앞의 강은 늘 이산 저산 합쳐진 물로 불어나 홍수가 나곤 했다. 그 센 물살에 징검다리는 흔적도 없이 떠내려 가버렸다. 버스를 타려면  강을 건너 큰 도로까지 가야했기에 홍수가 지나간 후에는 항상 온 마을 남자들이 전부 모여 ‘뚝다리’(징검다리) 보수작업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뚝다리는 금방 뚝딱 만들어지고 또한 홍수에 뚝딱 없어져 버린다고 해서 ‘뚝다리’라 일컫는 것 같다. 힘 좋은 아저씨들은 서로 자기의 힘을 과시하려고 천하장사처럼 훌쩍 돌을 안고 와서 던지기도 했지만, 전날 술을 많이 마셔서인지, 아니면 ‘밤일’을 무리하셨는지 어떤 아저씨들은 쑥스러운 듯 돌을 들지 못하고 굴려 나르면서 이런 저런 핑계를 늘어놓기도 하셨다. 그 당시 어린 우리들은 그런 아저씨들의 왁자한 농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같이 웃기도 했다. 뚝다리를 만들 때의 그 시끌시끌함은 조용하던 마을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여름 이벤트’였다. 그 이벤트에 덩달아 우리들도 신났다. 

우리들은 날씨가 좋은 날이면 타잔처럼 팬티만 입고 종일 멱을 감았다. 강가에 물길을 따로 만들어 끝 지점에 소쿠리를 묻어놓고 풀잎 가지로 얹어 위장 해놓으면 송사리가 물길 따라 떼지어 올라와 소쿠리 안으로 새카맣게 모여들었다. 그때 소쿠리를 떠올리면 송사리와 잡어들이 한소쿠리 가득하게 된다. 

그날 저녁 메뉴는 민물 매운탕이었다. 온가족이 평상에 둘러앉아 모기퇴치용 모닥불을 피워놓고 맛있는 저녁 식사를  했다.  그래서 여름에는 온 동네 집집마다 매운탕 파티가 잦았다.  또한 장마가 끝날 무렵에는 강물이 불어 마을은 완전히 세상과 단절되어 고립상태가 된다. 장을 보기 위해 시내로 가던 동네 아주머니들은 강물이 불어나 시내로 갈 엄두를 못 내었다. 

삽화 = 이영은(zzari)
삽화 = 이영은(zzari)

그래도 강물 광경에 마냥 신이 난 우리들은 윗마을 낭떠러지 바위 위에 올라가서 다이빙 선수처럼 알몸으로 겁도 없이 뛰어내렸다. 밑 마을까지 차가운 물속에서도 깔깔대며 둥둥 떠내려가며 놀았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찔하다. 그리고 신기하다. 그때  홍수에 그렇게 위험한 행동을 해도 어른들은 왜 꾸지람을 하지 않았을까. 

저녁 무렵 사람들이 마을 입구 경로당, 구판장(구멍가게) 주위로 어슬렁어슬렁 모여들었다. 그리고 세대별로 각각 나뉘어져 저마다 이야기꽃을 피웠다. 가끔씩 동네 형들과 누나들은 다른 마을로 원정을 가기도 하고  또 그 동네의 형들과 누나들이 오기도 했다. 어느 날 아래 마을에 형들이 동네로 원정을 왔다. 그 형들은 마을 입구 언덕에 앉아 우리 동네에는 없던 처음 보는 악기로 반주를 하면서 신나게 노래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환상적인 소리에 나는 완전히 압도당했다. 

도대체 세상에 저런 악기가 있었나? 조심스레 악기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가니 “야! 저리 안가!”하고 나를 향해 어떤 형이 호통을 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의 관심은 악기밖엔 없었다. 오로지 악기 소리만 들려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여러 음이 동시에 울리는 화음이 얼마나 짜릿하고 소름이 돋던지, 너무나 황홀했다. 형들이 아무리 야단 쳐도 내가 물러날 기미를 안 보이자 ‘개긴다’고 생각한 어떤 형이 본격적으로 본때를 보여주려고 손을 치켜들었다. 그때 마침 합류한 우리 마을 형이 “야, 임마! 이놈이 우리마을 이가수다. 기냥 냅둬라! 야는 이 악기 소리 때문에 꽂혀서 그라는 기다”라고 얘길 해 주었다. 얼마나 그 형이 고맙던지. 그날 목격한 그 악기는  통기타였다.

삽화 = 이영은(zzari)
삽화 = 이영은(zzari)

집에 돌아와서도 그 기타소리가 귓전에 계속 윙윙 대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이후 늘 기타소리를 잊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여름 방학이 되어서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 입구에 있는 작은집으로 놀러 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신의 도우심인가! 사촌 형님 방 장롱위에 기타가 놓여 있는 게 아닌가. 몇 개인가 줄이 끊어져 있었지만 나는 황금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환호성을 내지르며 와락 기타를 껴안았다.

연주는 고사하고 기타 소리조차도 내는 방법을 모르던 나는 그냥 땅에 눕혀서 가야금 연주 하듯이 ‘연주’했다. 그냥 소리를 내는 그자체가 너무나 좋았다. 하루 온종일 손가락에 물집이 생겨가면서도 아픈 줄도 모르고 기타에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었다. 작은집 바로 앞이 해수욕장인데도 불구하고 내 눈에는 해수욕장은 안보였고 며칠간 기타만 실컷 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프로 뮤지션들 중에는 악기에 대한 지대한 호기심으로 독학으로 시작해서 대가로 발전한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남들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고 해도 본인이 재밌게 느껴진다면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도 음악이 너무 재미있었기에 지금까지 긴 세월을 해 올수 있었던 것 같다.  

 
*폴리(Poly)악기와  모노(mono)악기 

악기에는 단음을 연주하는 악기와 동시에 두음 이상을 연주하는 악기가 있다.             

동시에 두음 이상을 연주하는 악기: 건반악기(피아노‧오르간‧하프시코드‧멜로디언)와 기타(Guitar)‧하프(Harp)‧아코디언‧하모니카 같은 악기를 폴리(Poly)악기라 한다.      

단음만을 연주하는 악기: 관악기(금관‧목관) 현악기(바이올린‧비올라‧첼로‧콘트라 베이스)를 모노(mono) 악기라 한다.  

저작권자 © 고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