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고양파주] 추석 명절을 하루 앞둔 9월 23일(일), 오늘은 100대 명산 등반 두 번째로 관악산(冠岳山)을 등반하였다. 관악산은 서울 관악구·금천구, 경기도 안양시·과천시 경계에 있는 산이다. 전체면적은 1,922만㎡(약 582만평), 최고봉은 해발 629.1m인 연주대이다. 1968년 도시자연공원으로 고시되어 있다.

관악산(冠岳山)은 그 꼭대기가 마치 큰 바위기둥을 세워 놓은 모습으로 보여서 ‘갓 모습의 산’이란 뜻의 ‘갓뫼(간뫼)’ 또는 ‘관악(冠岳)’이라고 했다. 

경기오악(京畿五岳, 파주의 감악, 포천의 운악, 송도의 송악, 가평의 화악, 서울의 관악)중의 하나이다. 조선 시대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화기를 끄기 위해 경복궁 앞에 해태를 만들어 세우게 한 ‘불기운의 산’이라고 하는 유래도 있다.

관악산은 빼어난 수십 개의 봉우리와 바위들이 많고, 오래된 나무와 온갖 바위와 어우려서 철따라 변하는 산 모습이 마치 금강산과 같다 하여 ‘소금강(小金剛)’ 또는 서쪽에 있는 금강산이라 하여 ‘서금강(西金剛)’이라고도 하였다.

산의 형세는 비록 태산은 아니나, 준령과 괴암이 중첩하여 장엄함을 갖추고 있다. 봄철 무리지어 피는 철쭉꽃과 늦가을 단풍이 장관이다. 그 정기가 뛰어나 효자, 효부와 충신열사를 배출한 명산으로 고려 시대 강감찬 장군과 조선 시대 신자하 선생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관악산과 인접한 삼성산(455m)은 삼성(三聖)이라고 일컬어지는 원효·의상·윤필이 산중에서 일막·이막·삼막 등 세 암자를 지어 수도하였다. 일막·이막은 임진왜란 때 타버리고 지금은 삼악만 남았는데 이것이 삼막사다.

그 외에도 1500여 봉우리와 그들 곳곳에 사찰(관음사·보덕사·호압사·성주암·자운암·약수암·연주암 등)이 산재하고 있다.

계절마다 변화무쌍한 아름다운 경치가 있고 관문을 비롯한 각종 편익시설과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많은 시민들이 즐겨 찾는 휴식처이자 명소로 이름나 있다.

아침 7시경 고양시에서 출발하여 45분 만에 관악구 서울대학교 앞에 도착하였다. 보통 때라면 1시간 30분 정도는 걸리는 거리인데, 추석 전날이자 일요일이라 막힘없이 서울 시내를 통과하였다. 관악산 입구에서 김밥을 사서 먹으면서 산행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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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공원 입구. 우측 뒷편에 정산이 보인다.

공원입구에 관악산시(詩)도서관이 있는 것이 눈에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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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입구에 관악산 시도서관이 있다.

오늘 산행 코스는 관악구에 있는 서울대학교 정문 근처, 관악산 입구(주차장 관리사무소)에서 출발하여 야외식물원을 지나 호수공원으로 좌회전하여 제4야영장 직전에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어 깔딱고개를 넘어 정상인 연주대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연주암을 구경하고 다시 깔딱고개를 통해 다시 돌아오는 코스로 정했다. 아침 8시경 관악산 입구에서 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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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공원 안내도 

삼거리에서 관악산 호수공원 표지판을 자세히 보고 길을 잡아야 한다. 놓치고 지나치면 관악산 정상이 아니라 삼성산으로 가게 된다. 연주대 표지판이 가르키는 방향으로 좌회전하면 호수공원이 나온다. 고양시에 있는 30만평이나 되는 호수공원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아담한 호수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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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 호수공원 이정표. 초심자는 여기서 길이 혼동될 수 있어 조심해야 한다.

호수공원 입구에는 오리 한쌍이 한가롭게 헤엄치고 있었다. 조용히 데이트하는 공간에 허락없이 침범한 것같아 미안한 마음이 불연듯 들었다. 관악산 호수공원은 방치되어 있던 수영장 부지를 서울시 관악구에서 자연 친화적인 공간으로 1997년 조성한 것이다. 이곳에는 한시문학의 대가인 자하 신위선생의 흉상과 정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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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 호수공원. 오리 한쌍이 한가로운 시간을 즐기고 있다.

호수공원 내에는 자하 신위 선생의 흉상이 있다. 조선 후기 영·정조 시대의 문예중흥기에 정신적 지주이면서 시(詩)·서(書)·화(畵)의 삼절이었다. 자하(紫霞)라는 선생의 호도 이곳의 옛지명이 자하동이라는데서 연유하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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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 신위 선생상. 

관악산 입구부터 줄곧 시멘트 포장 도로였다. 호수공원을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흙과 돌로 된 길을 밟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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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공원을 지나자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었다.

산 길을 기분 좋게 올라간다. 산 길 좌측은 맑은 물이 흘러 내리는 계곡이다. 1급수에 산다는 피라미도 보인다. 4야영장 직전에 연주대로 가는 표지가 보인다. 여기서 좌측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그냥 기분좋게 계속하면 삼성산으로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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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야영장 직전에 연주대 방향으로 가야 한다. 

방향을 잡아 올라가면 서서히 산행을 제대로 하는 느낌이 든다. 힘이 서서히 든다. 이제 좀 쉬고 싶을 때 깔딱고개가 시작된다. 위를 처다보면 힘이 빠진다. 이럴 때는 앞만 보고 가야 한다. 앞사람의 발 뒷꿈치만 보고 한발 한발 따라 가면 된다. 그래도 땀이 쏟아진다. 숨도 헐떡인다. 벅차다. 잠시 쉬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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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딱고개.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 실감하게 된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올라간다. 지난 9월 12일(수) 파주 감악산을 약 7km 거리 산행, 9월 16일(일) 고봉누리길 6.72km 거리를 걸었지만 아직 다리에 힘이 부족하다. 마지막 힘을 내본다. 아! 드디어 깔딱고개를 넘었다. 이제 정상인 연주대가 500m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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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딱고개를 통과하여 정상이 보이는 지점에 오르면 이정표가 희망를 준다.

쉬운 길이 아닌 바위로 된 산등선길을 선택해 연주대를 도전해 보기로 했다. 저 멀리 관악산 기상관측소와 그 우측에 연주대가 보인다. 길이 너무 위험해 일순간 겁이 났다. 젊은 사람이 아니면 말리고 싶다. 경치는 장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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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 기상관측소. 둥근 돔 모양이 기상레이더이다.

드디어 관악산 정상이다. 629m의 정상. 관악산은 정상에 가까이 갈수록 바위가 많고 위험하다. 1년에 200건 이상의 사고가 발생하는 곳이니 가능한 위험한 코스는 피해야 한다. 

관악산은 산봉우리의 모양이 불과 같아 풍수적으로 화산(火山)이다. 이 산이 바라보는 서울에 화재가 잘 난다고 믿어 그 불을 누른다는 상징적 의미로 산꼭대기에 못을 파고,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옆 양쪽에 불을 막는다는 상상의 동물인 해태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

조선 태조는 화환(火患)을 막기 위해 무악의 말에 따라 이 산에 연주(戀主)·원각(圓覺) 두 사찰을 세웠다고 하고, 서울의 숭례문을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과 관악산을 잇는 일직선상에 위치하게 해서 관악산이 덜 보이게 한 것 등은 불기운을 막기 위한 풍수적 의미이다.

관악산의 한 봉우리인 호암산 능선에는 통일신라 때 판 것으로 추측되는 산상 우물(한우물)도 있는데, 이것도 관악산의 불기운을 누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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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 정상.

관악산은 그 북쪽 기슭 낙성대에서 출생한 고려의 강감찬 장군(948~1031)과 관련한 전설이 많다.

그가 하늘의 벼락방망이를 없애려 산을 오르다 칡덩굴에 걸려 넘어져 벼락방망이 대신 이 산의 칡을 모두 뿌리째 뽑아 없었다는 전설과 작은 체구인 강감찬이지만 몸무게가 몹시 무거워 바위를 오르는 곳마다 발자국이 깊이 패였다는 전설도 있다.

이 전설을 뒷받침해 주듯 관악산에는 칡덩굴을 별로 볼 수 없고, 바위 곳곳에는 아기 발자국 같은 타원형 발자국들이 보인다.

고려 명장 인헌공 강감찬 장군 탄생지를 기념하기 위하여 서울시는 관악구 봉천동(낙성대로 77)에 사당 안국사를 짓고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낙성대공원을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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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은 온통 바위 덩어리다.

한남정맥의 중추를 이루는 경기도 안성군 칠장산(七長山)에서 달기봉·광교산 등을 거쳐 북서쪽으로 가지를 친 능선이 서울 한강 남쪽에 이르러 마지막 힘을 다해 불꽃처럼 솟구친 산이 관악산이다.

관악산은 동봉(연주봉)의 관악, 서봉의 삼성산, 북봉의 장군봉과 호암산을 아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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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서 바라 본 서울. 저 멀리 한강이 보인다. 

정상에서 바위를 타고 옆으로 내려오면 기가 막힌 장소에 암자가 하나 있다. 어떻게 이런 곳에 암자를 지을 생각을 했는지 경이롭다.

연주대는 경기도 기념물 제20호로 관악산 기암 절벽 위에 석축을 쌓아 터를 마련하고 지은 암자이다. 원래 신라 승려 의상대사가 신라 문무왕 17년(677년)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관악사와 함께 건립한 것으로 의상대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조선 시대 태조1년(1392년)에 중건하였다.

관악사와 의상대는 염주암과 연주대로 이름이 바뀐 것인데,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조선 개국 후 고려 충신 강득룡·서견·남을진 등이 이곳에 들러 개성을 바라보며 두문동에서 순국한 고려의 72인의 출신·열사와 망해버린 왕조를 연모했다고 하여 연주대라 불렀다는 것과 조선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과 차남 효령대군이 왕위 계승에서 멀어진 뒤 방랑하다가 이곳에 올라 왕위에 대한 미련과 동경의 심정을 담아 왕궁을 바라보았다 하여 연주대라 이름지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두 이야기 모두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이다. 이것은 연주대 주변 경관이 워낙 뛰어난 절경인데다 한눈에 멀리까지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여서 붙여진 전설로 생각된다.

현재의 건물은 맛배지붕으로 크기가 세 평 정도며,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을 최근에 해체·복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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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대(戀主臺)는 관악산 연주암 북쪽 꼭대기 절벽에 위치한 경기도 기념물이다. 

정상을 거쳐 염주암을 방문하였다. 대학생 시절 친구들과 점심을 먹었던 기억이 있는 곳이다. 공양한 기억은 있지만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 과거 건물에 대한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연주암 대웅전 앞에는 ‘평화의 불’이라는 시가 있다.

"해와 달이 다 하고

중생업 다 해도

우리는 둘이 아닌

不二의 진리,

이 도량 밝게 비춘 평화의 불

남과북이 하나 되길 서원하오며,

무명 번뇌 모두 태운 모든 중생들

평화, 열반 이루도록 발언하나이다."

선묵혜자 스님이 부처님 탄생 성지 룸비니를 밝히던 평화의 불을 채화하여 3만리 이운의 길을 통해 한국으로 모셔와 오늘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며 연주암에 평화의 불을 밝힌다. 2015(불기 2559)년 4월 9일

한편, 연주암 대웅전 앞에는 삼층석탑이 있다. 이 탑은 높이 3.6m로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이다. 각 부분의 비례가 잘 맞고 제작수법도 정연하여 고려중기 이전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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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암 대웅전. 앞에 삼층석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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