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수업이 진행되는 탁 트인 작업 공간. <사진=방종모(비젬포토)>

탕.탕.탕.탕.탕. 느닷없이 발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고요하던 미술학원의 침묵이 잠시 지워진다. 소리를 내던 아이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함께 작업을 하던 친구도, 선생님도 붙드는 사람이 없다. 아이가 웃으면 가만히 웃어주고, 말을 걸면 응대해주고, 다시 각자의 캔버스에 고개를 묻는다.

발달장애 아이의 수업 한 시간은 자유롭다. 부모 입장에서라면 오히려 ‘방치’에 가깝다. 발달장애, 자폐, 다운증후군의 장애마저 채광 좋은 화실의 빛 속에 조용히 스며드는 곳, ‘그림이야기’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시간을 나누고 공간을 채우고 예술을 이야기하는 미술학원이다.

 

그림은 마음으로 그리는 철학

“비장애 친구들에게 장애가 있는 친구를 돌보라는 말은 하지 않아요. 장애가 있는 친구들에게도 너희는 특별하지 않다고 말해줍니다.”

이재연 원장이 1시간의 통합 수업 중 장애 학생에게 집중하는 시간은 20여 분 정도. 남은 시간 동안 마무리할 과제를 주긴 하지만, 그 과제를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의 문제는 아이 몫이다. 아이는 수업 중인 다른 친구들 주변을 서성거리거나 완성된 다른 작품들을 구경하면서 ‘그림이야기’라는 공간에 녹아든다.

“감정이 자라지 않은 아이들에게 기능적인 기술을 함부로 가르치지는 건 위험해요. 그림은 기술로 그리는 게 아니거든요. 미술적 경험을 나누고 제안하면서 아이들이 빛을 발하는 쪽으로 이끌어줘야죠.”

아이가 품고 있는 정서와 본능이 그림을 끌어갈 때, 재능도 발현된다.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으려 애쓴다는 이재연 원장의 화실에서는, 그래서일까, 유독 많은 청년 작가들이 포진해 있다.

자폐 서번트 화가 김범진 씨는 하루의 대부분을 그림이야기에서 보낸다.
 
'그림이야기' 출신의 작가들과 전시 준비에 여념 없는 이재연 원장.

빛으로 이끄는 작업 공간

2005년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축복받은 천재들의 초대>에 출연하여 세상에 알려진 자폐 화가 김범진 씨(28세)는 중학교 1학년 때 ‘그림이야기’를 찾았다. 드로잉으로 꽉 채운 스케치북을 양손에 들고 왔던 범진 씨를 이재연 원장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엔 색을 입히는 작업을 거부했어요. 한 가지 색으로 선을 뭉개기도 하고 선 위에 덧대듯 묽게 칠하고는 다했다고 우기기도 하고. 그럴 땐 기다려 주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친구가 아니니까, 내면적인 감성이 기능을 수용할 때까지 제안하고 기다려주는 거죠.”

2008년 예술 아르떼 <피카소를 꿈꾸는 자폐 소년의 전시회>, 2009년 세종문화회관 별관 <소리없는 울림 전> , 2014년 인사동 경인화랑 <조이아트전> 등 굵직한 전시회와 2013년 경기 장애인 미술공모전, 2016년 국제 장애인 미술대전 등의 수상을 거치면서 김범진 씨는 어엿한 화가로 성장했다. 범진 씨는 오늘도 ‘그림이야기’에서 작업을 하며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

2011년 단원미술제 공모전에 입선하면서 등단한 한승욱 씨(25세)도 그림이야기 식구다. 사춘기를 험하게(?) 보낸 덕에 인연이 닿았다. ‘그림이야기’ 이재연 원장과의 미술치료가 인생의 방향을 바꾼 셈이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된 입시 미술이 복병처럼 스트레스로 찾아왔을 때, 이재연 원장은 입시를 포기하겠다는 승욱 씨의 결정을 지지해줬다.

“입시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객관적인 틀을 갖춰야 하거든요. 거기에 반발을 한 거예요. 그림 패턴을 바꿔야 한다면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하더라고요.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요.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죠.”

미대에 합격한 동기들과 함께 준비한 공모전에서 아이러니하게 승욱 씨만 입선을 했다. 승욱 씨는 ‘그림이야기’ 출신 미술 전공자, 작가들과 함께 소규모 커뮤니티를 결성,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림이야기는 인간과 가치의 편견, 경계를 미술을 통해 허무는 공간이다. <사진=방종모(비젬포토)>
3월부터 매주 토요일, 학원 앞뜰에서는 아트프리마켓이 열릴 예정이다.<사진=방종모(비젬포토)>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서

‘그림이야기’는 공식적으로 1년에 두 번, 학원 앞 공원과 아람누리 극장 갤러리에서 학생들의 작업물을 모아 전시회를 연다. ‘그림이야기’ 출신 작가들과 커뮤니티 전시로 1년에 3~4번, 화실도 갤러리가 된다.

최근에는 작가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주 1회 시와 그림을 접목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3월부터는 매주 토요일 더 많은 사람들이 미술과 가까워질 수 있도록 체험 위주의 프리마켓을 오픈한다. 컵받침 만들기, 양말에 그림 그리기, 염색하기 등등 월별 주제를 정해 운영할 계획이다.

“누구나 좋은 것을 보면 좋은 쪽으로 움직이지 않나요? 장애 아이들에게는 일반적인 것에 대한 결핍이 있어요. 특별할 것 없는 일상 속에, 일반 속에 있어야 특별함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죠. 결핍은 누구에게나 있어요. 모두가 그 결핍에서 자유로워지기를 바랍니다.”

보이지 않는 길은 더 절실하다. 지름길 버리고 가다보면 만날 수 있는 험한 길목에서, ‘그림이야기’가 위로와 나눔의 공간이 되어주면 좋겠다. 아이에서 어른까지, 장애에서 비장애까지, 이재연 원장은 ‘그림이야기’가 미술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작업실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림이야기(031-919-8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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