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일보] 어머니는 애창곡인 백설희 님의 ‘봄날은 간다’를 술술 실타래 풀어내듯 불러주셨다.이젠 한 음 올리기도 어려워서 전처럼 간드러지는 육성으로 노래를 할 수 없지만평생 내 마음의 노래였다고 눈에 이슬을 촉촉이 머금고 말씀을 건네주셨다.덧붙여서 어쩌면 노래 구절도 우리 인생과 닮지 않았소? 하시며 한 소절 한 소절 정성껏 들려주셨다.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 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
[고양일보] “내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 몇 권이 나올거요” 라고 우리 어머니들은 주저 없이 말씀하신다. 대단한 업적을 남긴 인생을 드러냄이 아니다. 인생의 모퉁이를 돌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벼랑 끝에 내몰리기도 하고 한고비 넘겼더니 다시 또 산 넘어 산을 만나는 드라마 같은 인생을 다들 살아오셨다.그래서 한마디로 책 속의 주인공이 될 법하다고 스스로 자평하신다.진경숙 어머니의 삶도 예외는 아니었다. 팔순이 넘은 어머니의 인생 이야기 또한 책 한 권으로 부족한 분이었다. 어머니는 이북에서 진신자로 태어나 지금은 진경숙으로 살고 계
할머니의 뒤를 따랐다. 뒷짐 지고 윗마을로 오르시는 할머니께 차순태 어르신 댁을 여쭈었더니 할머니께서 “순태, 그니 집은 이짝 골목으로 들어가서 첫 번째 언덕 집이여” 여든 일곱의 어르신을 순태라고 부르신다. 그렇다면 할머니도 동년배이거나 손위 누이 쯤 되는 분이다. 무수한 세월을 같이 걸어온 이웃들이다.어르신 댁 방문을 열면 흑백사진 속의 부부가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다. 차순태 어르신의 어머니 아버지 사진이다.뭉클한 마음에 물끄러미 바라보던 곁눈으로 어르신의 눈에 맺힌 이슬을 보고 말았다. 여든 일곱의 ‘노인’도 부모님을 생각하며
[고양일보] 누구나 꽃 같은 시절이 있다. 어머니댁 낮은 담장 밑으로 키 작은 꽃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낮 달맞이꽃, 소담스런 맨드라미, 과꽃, 이름도 어여쁘고 자태도 얌전하다. 이수자 어머니도 그런 분이셨다.■ 고단한 삶속에 한줄기 빛, 다정한 말 한마디 따뜻한 눈길하루 종일 새벽부터 집안 살림에 막내 시누 업고 우물물 길어오고 밭농사에 누에까지..작은 몸으로 무쇠처럼 일만 했다. 삶이 뭔지 인생이 뭔지 한순간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내 삶에 유일한 희망은 시할머니였다. 시할머니도 나와 같은 고단한 시절을 분명히 보냈던 분인데
누구나 꽃 같은 시절이 있다. 어머니댁 낮은 담장 밑으로 키 작은 꽃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낮 달맞이꽃, 소담스런 맨드라미, 과꽃, 이름도 어여쁘고 자태도 얌전하다. 이수자 어머니도 그런 분이셨다.■ 거짓말, 저 열아홉 살이에요“열아홉 살이에요”시집가서 이웃 형님들이 몇 살이냐 물으면 열아홉 살 이라고 거짓말을 줄곧 했다.열다섯 살에 시집왔다고 말하기가 너무 창피했다. 입하나 덜겠다고 오라버니가 보낸 시집이라 더군다나 키 작은 내가 열다섯 살 때는 언뜻 보면 열 살짜리 계집아이로 밖에 안 보였다. 그런데 시집을 간다니 더군다나
고목(古木)의 그늘이 주는 평안, 느티나무 같은 사람마을 입구 느티나무 한그루, 오랫동안 오가는 주민들의 벗이 되어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메아리로 돌려주고 지나는 차 소리, 세상의 소란한 소리도 모두 삼키며 든든한 이웃이 되었다. 나이가 몇 살인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그 동네에서 나이 많기로는 몇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말 그대로 이원의 ‘터줏대감’이다. 느티나무와 벗 되는 터줏대감이 한 분이 더 계신다. 이종무 아버님무수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마을이 아버님을 지키고, 아버님도 마을을 저버리지 않았다.■ 징용, 겁에 질린 얼굴로
원기소 만들던 서울제약의 또순이외갓집에 기거 하다가 서울로 올라가서 방직회사에 다녔다가 제약회사 채용 공고를 보았다. 서울 올라 갈 때는 촌티를 안내려고 핑크색 유똥 치마에 저고리 해 입고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우선 서울살이는 남의 집 일을 해주면서 시작되었다. 잘 사는 집도 석탄을 떼서 난방을 하느라 얼굴만 뽀얗고 다들 새카맸다. 방직공장에 다니면서 자취하고 마침 제약회사 공고가 났다. 당시는 유한양행, 서울제약 (서울 약품 공업사), 삼일제약등 제약회사가 세 곳 이었다. 나는 서울제약(서울 약품 공업사)에 입사를 했다.서울제약
무명천에 핀 목단 꽃“나 특별한 얘기도 없는데...”전화기 너머로 말끝을 흐리셨지만 1층까지 마중 나오신 어머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어머니의 반달 같은 눈웃음에 덩달아 눈웃음으로 화답했다. 마스크가 원(怨)이로다.“나 작년까지는 펄펄 날라 다녔는데...” 하루하루 지나는 시간이 너무 귀하다고 우회적으로 마음을 드러내셨다. 노인 일자리 활동과 포크 댄스로 건강을 지키시고 실버 기자단이라 시간도 유익하게 쓰고 계셨다. 去頭截尾(거두절미), 멋진 어머니...결핍투성이던 유년, 어린 눈에 그 넓던 신작로는 그저 좁은 골목길이더라충
[고양일보]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새파란 잔디 엮어 지은 맹세야세월에 꿈을 실어 마음을 실어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자낙화유수 네 글자에 마음이 살짝 흔들린다어여쁘던 꽃이 물위로 진다. 물결 따라 흘러간 꽃잎은 어디로 갔나이순희 어머님이 소녀시절부터 잘 부르시던 남인수 선생님의 ‘이 강산 낙화유수’ 노랫말이다. 어머니께서 세월의 질곡과 무게를 알기 전부터 유난히 좋아했던 노래였다. 당신의 삶을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열 살 무렵 무심코 흥얼대던 노랫말처럼 인생이 흘렀다. 질곡의 삶을 견뎌내고 이제 석양의 노을처럼 아름다운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새파란 잔디 엮어 지은 맹세야세월에 꿈을 실어 마음을 실어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자낙화유수 네 글자에 마음이 살짝 흔들린다어여쁘던 꽃이 물위로 진다. 물결 따라 흘러간 꽃잎은 어디로 갔나이순희 어머님이 소녀시절부터 잘 부르시던 남인수 선생님의 ‘이 강산 낙화유수’ 노랫말이다. 어머니께서 세월의 질곡과 무게를 알기 전부터 유난히 좋아했던 노래였다. 당신의 삶을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열 살 무렵 무심코 흥얼대던 노랫말처럼 인생이 흘렀다. 질곡의 삶을 견뎌내고 이제 석양의 노을처럼 아름다운 황혼을 만끽하
[고양일보] 아직은 선로 위를 달리는 ‘인생 열차’ 승객, 식당 칸에서 창밖 풍경을 그리다.김 선생님에게는 노신사라는 낱말도 나이라는 숫자로 매겨지는 한정된 단어다. 패션 감각으로도 한 몫 하시는 김종철 선생님은 70년의 세월 속에서 때론 주연으로, 혹은 조연으로 자리매김하셨다.70년의 성상을 쌓으신 선생님의 인생 이야기 속에 시골 동네에서 가장 먼저 도시 중학교로 진학하셨던 추억, 산업역군이었던 청년시절이야기, 그림과 서예, 인문학적 소양의 시간을 쌓으면서 노년을 보내는 모습이 잘 살아 오신 지난날을 엿볼 수 있었다. 물론 누구나
아직은 선로 위를 달리는 ‘인생 열차’ 승객, 식당 칸에서 창밖 풍경을 그리다김 선생님에게는 노신사라는 낱말도 나이라는 숫자로 매겨지는 한정된 단어다. 패션 감각으로도 한 몫 하시는 김종철 선생님은 70년의 세월 속에서 때론 주연으로, 혹은 조연으로 자리매김하셨다.70년의 성상을 쌓으신 선생님의 인생 이야기 속에 시골 동네에서 가장 먼저 도시 중학교로 진학하셨던 추억, 산업역군이었던 청년시절이야기, 그림과 서예, 인문학적 소양의 시간을 쌓으면서 노년을 보내는 모습이 잘 살아 오신 지난날을 엿볼 수 있었다.물론 누구나 예외 없이 삶의
1944년 유길종여과지로 우려낸 삶, 불순물이 없어 정갈함으로 방점을 찍다.옥* 지업사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작은 난로 위에서 끓고 있는 양은 주전자, 옹기종기 둘러앉은 친구들, 끓고 있는 물처럼 친구의 담소도 따뜻한 훈기를 담고 모락모락 피어난다. 소박한 시골 점방(店房)을 그린 풍경화 한 편이다도라지 물을 올려놓았지만 하루 종일 끓여서 마시고 물 붓고 또 마시고 물 부어서사모님이 “이제 맹물됐어요”라고 하시며 싱겁다는 표정이시다. 맹물이 아닌 불순물이 없이 여과된 물이라고 말한들 따져 물을 이도 없을 것이다.인생도 진한 삶을 살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만 실향민이 아니다. 어르신도 실향민이셨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멱 감던 시냇가의 추억자리를 잃었다. 대청댐에 수몰지구가 된 덩기미와 피실 고향집도 잃어버렸다. 그리움만 남은 마음의 고향이라시며 당신도 실향민이라는 말씀을 놓치지 않으셨다.마음의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비단 어르신뿐이랴. 인생의 방향을 잃어버렸다면 고향을 잃은 것과 다를 바 없다. 어르신의 인생 한 대목 한 대목을 엿보면서 잠시 마음의 고향을 찾아가는 여행을 떠나 보기로...■ 수몰 이주 이후 달라진 삶의 여건들산 벚꽃이 환하게 피던 날 아내를
이복용 (1934년~)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만 실향민이 아니다. 어르신도 실향민이셨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멱 감던 시냇가의 추억자리를 잃었다. 대청댐에 수몰지구가 된 덩기미와 피실 고향집도 잃어버렸다. 그리움만 남은 마음의 고향이라시며 당신도 실향민이라는 말씀을 놓치지 않으셨다.마음의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비단 어르신뿐이랴. 인생의 방향을 잃어버렸다면 고향을 잃은 것과 다를 바 없다. 어르신의 인생 한 대목 한 대목을 엿보면서 잠시 마음의 고향을 찾아가는 여행을 떠나 보기로...■ 수몰로 잃어버린 고향의 추억내 고향 피실은 1
1930년 이후분 어르신운명이라는 말로도 위로가 안 되는 삶이 있다.어르신은 스물한 살에 남편을 황망하게 떠나보내고 눈망울 맑은 두 살 아들과 험난한 세상에 내 던져졌다.열여덟 살에 시집가서 2년을 살고 어르신 인생은 앞길을 짐작할 수도 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지독하고 기막힌 세월을 거슬러 한 많은 삶은 아흔두 해를 지나고 있다.그 세월을 어찌 살아내셨을까요. 존경합니다. 당신의 삶을...■ 아픈 기억 그 너머의 아련한 추억들대전도 나에게 사고무친(四顧無親)의 망망대해와 같은 곳이었다. 그래도 옥천에서 가깝다는 위로 아닌 위로를